1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채우기

인생의 즐거움 찾기 9

by 햇살바람


10대 중후반 어느 날, 갑자기 나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당시 가졌던 만화가의 꿈을 접어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오래 해온 짝사랑에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고, 별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냥 그 순간 내가, 그때까지 살아온 내 삶이, 하찮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그때 제일 먼저 한 일이 내가 가진 물건을 버리는 거였다.


1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를 방으로 가져와, 버리고 싶은 내 모습과 관련된 물건들을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책꽂이며 서랍이며 장롱이며 내가 가진 물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바닥에 쏟은 다음 분류를 했다. 서랍 하나가 끝나면 다음 서랍을 꺼내는 식이었다. 버릴 물건, 버리지 않을 물건, 버릴지 말지 고민 중인 물건 때문에 바닥은 곧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침대 반쪽도 물건에 자리를 내주는 바람에 벽 쪽에 붙어서 잠을 자야 했다. 물건이 소환하는 기억을 전부 마주하다 보니, 정리를 다 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방 어디에 그렇게 많은 물건들이 있었나 모르겠다. 쓰레기봉투가 꽉 찬 건 물론이고, 재활용 쓰레기도 몇 번에 나눠서 들고나가야 할 만큼 잔뜩 나왔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그때 버린 것을 후회한 적도 있지만(예를 들면 일기장을 버린 건 좀 아깝다), 쓰레기봉투 하나를 꽉 채워 버렸을 때 느꼈던 묘한 희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이후 10리터짜리 쓰레기봉투는 내게 특별한 물건이 되었다. 마음에 온통 먹구름이 낀 날이면, 작정하고 쓰레기봉투를 챙긴다.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할수록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과거로 기울었던 추가 다시 균형을 맞춘다. 내가 선택한 물건만 남으면, 내가 미래를 선택한 것처럼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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