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뇽안뇽안늉 Apr 02. 2024

올해 연말도 여지없이, 나얼의 ‘Gloria’를

평범한 일상에도 종종 영화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2023년에 쓴 글입니다.


(당연히) 열 손가락에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꽤나 많은 수의 연말을 보냈지만, 2017년의 12월은 내 인생 가장 동화적인 연말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마냥 아찔한 착각을 할 만큼 로맨틱한, 그러나 영화는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음을 체감했던 매혹적인 12월의 이야기는 첫 사회생활에 발을 떼던 신입 사원의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여행사 마케팅팀 막내로 약 6개월을 지내다 홍보팀으로 이동한 지 한 달도 안 된 ‘갓난아기’ 였던 시절, 나는 한 예능 프로그램의 PPL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좌충우돌, 곁눈질해 가며 겨우겨우 업무를 하던 당시에 부서장님이 나에게 대뜸 여권이 있냐고 물으셨다. 이번 파리 촬영에 견학 겸 출장 다녀오라며. 그것도 혼자!

 게다가 터키항공의 비즈니스 잔여석이 생긴 덕에 상품 부서에서 비즈니스 석을 왕복으로 끊어줬다. 운도 좋지! 첫 출장이 파리라고? 크리스마스 시즌에? 그것도 비즈니스로? 신입사원은 결코 누릴 수 없는 호사였다. ‘혼자 가니까 적당히 타이밍 봐서 놀러 다녀라 (나라면 그러겠다)’와 같은 팁 아닌 팁(?)을 전수해 준 사수의 조언까지. 출장 전 설렘은 배가 되었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도비의 마음과 비슷했달까. (사실 이 모든 것은 부서장님이 마음을 써 주신 덕이었다.)

 업무도 잘 모르는데 촬영에 동행한들 뭘 할 수 있었겠는가. 누가 봐도 나는 촬영장에 쫄래쫄래 따라온 풋내기에 불과했다. 촬영은 숨 가쁘게 돌아갔고, 나는 그저 촬영장 밖에서 멍하니 서 있는 게 전부였다. 촬영 장소가 작은 실내면 들어가기도 어려워 많은 인원이 밖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바로 첫날이 그러했다. 나는 파리의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그다음 날부터 전적으로 사수의 조언을 따르기로 한다.


 나쁜 남자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다가 상대에 의해 일방적인 이별을 맞은 지 두 달이 채 못되던 시점에서의 나는 사실 파리의 겨울바람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나얼의 ‘Gloria’를 배경 음악 삼아 반짝반짝한 에펠탑을 바라보며 별 청승을 다 떨었더랬다. 사실 여기서부터가 내가 누린 진짜 호사고,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다시 전환점을 맞는다.

 

 행여나 길이라도 잃을 세라 신경 써주신 부서장님의 배려 덕에 나는 전용 차량을 배정받게 되었다. 운전을 도맡은 아르바이트생은 파리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나보다 7살 많은 유학생이었다. 어차피 나야 촬영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짐 운반 이외에는 없었으므로 촬영장 근처를 혼자 돌아다니거나 추우면 차로 돌아와 유학생과 수다를 떠는 것이 선택지의 전부였다.

 파리 생활은 어때요, 어떻게 오셨어요, 한국에서도 전공이 음악이셨나요… 와 같은 마치 소개팅에서 할 법한 대화를 나누며 우리도 모르는 새에 은근한 로맨스가 생겨나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때는 12월이고, 여기는 한국이 아니고, 파리의 거리는 연말 분위기로 달뜬 인파가 가득하고, 그리고 우리의 옆에는 아무도 없고! 아무튼 우리가 거부하려야 거부할 수 없는 갖가지 연말 요소들 탓에(라고 합리화를 해본다) 출장에서의 매우 짧은 ‘썸’이 시작되었다.


 같이 저녁 먹자는 말에 심쿵, 파리의 괜찮은 레스토랑을 소개하겠다는 말에 한번 더 심쿵, 그가 구사하는 프랑스어에 심쿵 한번 더! 파리의 크리스마스이브가 이토록 낭만적일 수 있을까. 샹젤리제 거리를 드라이브하며 들었던 브라운 아이즈 소울의 ‘My Story’는 당시의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설렘을 뭉게뭉게 피어오르게 만드는 딱 적합한 곡이었다. 업무 배우라고 바다 건너 저 먼 ’불란서’로 보내놨더니, 신입사원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는 핑계로 지금 이 시점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은근한 로맨스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동화 같은 로맨스도 내일이면 끝이 날 터였고,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사실 나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길을 오롯이 나 혼자 보낼 작정이었다. 공항버스를 타고 노래를 들으며 차창 밖을 바라보고는 감상에 젖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설령 청승이라 할지라도 나는 진실로 기껍게 해낼 생각이었다. 다만, 의사를 밝혔음에도 상대가 자꾸 공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통에 결국 그에 응할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서부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사람과 ‘안녕해야’ 하는데 왜 내 계획에 어깃장을 놓느냐는 비뚤어진 마음과 함께. 배웅이라는 행위는 상대의 배려이자 마지막으로 건넨 마음이었는데.

 로맨스를 벗어난 나는 돌연 차가워졌고, 공항에 도착하기 무섭게 잘 지내라며 섣부른 안녕을 하고 게이트로 들어가 버렸다. 못내 아쉬워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면 꽤 시간이 지난 지금도 미안해진다. 긴 인연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건 나에게 마음을 써 준 상대에게 그런 식의 인사는 적절하지 못했다. 이때의 마지막 장면은 후에 내가 이별을 대하는 태도에도 꽤나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무튼 소기의 성과(?) 없이 출장지에서의 썸은 싱겁게 마무리되었지만, 그래도 떠올리면 풋 하고 웃음이 나는 즐거운 기억이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싫었던 적이 처음이었을 만큼 아늑했던 비즈니스석, 낭만적인 파리의 밤 풍경, 나쁜 연애를 끊임없이 곱씹다가 마주친 타지에서의 로맨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던 나얼의 ‘Gloria’까지. 찬 바람이 겨울의 시작을 알릴 즈음이면 여지없이 그때의 연말이 떠오른다. 마치 TV 속 옛 풍경들에 ‘그땐 그랬지’ 하는 어른들의 마음처럼.

 

 인생은 대체로 지루하지만 영화 같은 순간도 간혹 있다. 그것이 비록 가뭄에 콩 나듯 희박할지라도.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 그 희박함 때문에 역설적으로 인생은 좀 살만한 것이 되나 보다. 진짜 어른들이 보기에는 32살의 깨우침이란 좀 설익은 구석이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올 겨울 나얼의 ‘Gloria’를 들을 테다. 영화 같았던 순간을 회고하고, 또한 앞으로 다가올 영화를 기대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