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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뇽안뇽안늉 Apr 03. 2024

앵콜은 노래로만 들을게요

이별을 하더라도 뭐 하나는 남으니까

4년 전, 정말 좋아했던 상대와 헤어졌다.


 당시에는 정말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기에 관계의 끝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연애 중 약간의 불안함은 있었지만 그저 지나가는 잠깐의 마음으로만 여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상대는 이별을 선언하기 몇 개월 전부터 끝을 그리고 있었더라. 그 사실을 상대에게서 직접 들었을 때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늘 내 앞에서는 헤헤 웃던 사람이라 연애 자체를 즐거워만 하는 줄 알았는데, 나 모르게 혼자 이별을 생각했다는 사실에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여기서 관계를 이어나간다 하더라도 마음이 커지지 않을 것 같다는 그의 마지막 말은 꽤나 아프게 들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확하게 본인의 의사를 밝혀주어서 고맙기도 했다 (착한 남자가 되겠다며 이별의 원인을 다른 곳으로 빙빙 돌리는 것은 상대에게 더 잔인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별에는 마음 이외의 그 어떤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연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수식이 가장 잘 어울리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내가 정말 ~~~ 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연애할 거야.’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그 반대의 것 (무엇이 되었든)을 이길 만큼 크지 않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별이란 결국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정말 어쩔 수 없이 헤어짐을 택해야만 하는 상황도 있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 말을 한 상대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러고는 너의 의견을 존중하겠노라며 나름대로 쿨하게 보내줬다. 지금 떠올려보니 매우 부끄러운 기억이다. 그렇지만 이런 흑역사 하나쯤은 있어야 인생이 아쉽지 않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이렇게라도 자기 합리화를 해야 조금 덜 부끄럽다. 결론적으로는 멋진 척해봤자 다 소용없다. 괜히 지만 힘들다. 그렇게 멋진 척, 쿨한 척 다 하고 집에서 미친 듯이 울었다. 아주 그냥 숨 넘어갈 듯 ‘끅끅’ 거리면서 말이다.


 브로콜리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는 그때 당시 참 많이 들었던 곡이다. 사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노래이기는 했으나, 그리 즐겨 듣지는 않았다. 원래 이 노래는 학생 때 친구들과 즐겨 가던 노래방에서 처음 접했다. 요새는 코인 노래방이 보편화되어서 없는 것 같은데, 어렸을 때 갔던 노래방은 대부분 널찍한 방의 ‘룸 형식’이었다. 룸 벽에는 인기 차트나 노래방 신곡을 소개하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나는 그때 ‘브로콜리너마저’를 처음 봤다.

 친구가 부르는 발라드를 들으며 그 의미를 한참 동안 생각했다. 브로콜리너마저가 뭐야? 브로콜리를 좋아하나? 아니면 브로콜리 물가가 올랐나? 브로콜리 너마저 (비싸졌니) 이런 뜻인가?

 ‘꾸안꾸’ 비슷한 느낌으로, 아무 단어나 조합해서 대충 지었지만 그래서 우리는 좀 시크해 뭐 이런 건가? 사춘기 시절의 나에게는 브로콜리너마저라는 단어 자체가 히피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아무튼 간에 이해할 수 없어 이상하게 보였더랬다. 이상함을 넘어 기괴하게 보였던 이름의 밴드라면 노래마저 이상할 거라는 더욱 기괴한 일반화와 함께.


 다시 이 곡과 마주한 장소는 또 노래방이었다. 그때도 나름 어렸던 22살이었다. 나는 나보다 3살 많은 언니와 함께 노래방에 갔는데, 언니는 이 노래를 모르냐며 세대 차이를 느낀다는 말과 함께(나를 어리다고 우쭈쭈 하던 언니의 나이는 25살이었다) 브로콜리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를 불렀다. 당시의 나는 ‘어깨춤을 절로 추게 하는’ 댄스 음악들을 주로 들었던 터라 인디밴드의 곡들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특히나 이 ‘앵콜요청금지’는 도대체가 어느 리듬에서 내적댄스를 춰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그리고 역시나.. 밴드의 이름이 이상했다! 음, 이런 노래도 있구나 하고 넘겼다.


 4년 전 끝난 연애의 시작점에서 이 노래를 다시 만났다. 공교롭게도 헤어진 그 상대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곡들을 참 좋아했다. 차 안에서 그가 ‘앵콜요청금지’를 틀었을 때 22살 때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마치 주입식 교육처럼 ‘앵콜요청금지’를 자주, 함께 들으며 브로콜리너마저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더랬다. 나중에는 가사를 보지 않고도 노래를 완창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앵콜요청금지’,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처음의 감상은 밴드 이름도 이상한데 곡명도 이상하다는 것이었다)’와 같은 대중적인 노래로 시작했다. 그러다 점점 다른 노래들을 찾아보고 들어보면서 이 밴드의 노래들이 내 취향에 딱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내가 아는 유일한 인디밴드는 가을방학 하나에 불과했는데 브로콜리너마저로 취향이 넓어졌다는 사실에 자못 뿌듯해졌다(두 밴드의 공통분모가 보컬인 ‘계피’ 인건 함정). 왜 뿌듯한지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2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서로의 일상을 나누며, 그의 취향은 내 취향이 되었다.


 ‘2009년의 우리들’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보편적인 노래’

 ‘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들인데, 애석하게도 이별 후에 브로콜리너마저의 음악을 더 잘 알게 되었다. 더 빨리 알았더라면 그와 함께였을 때  더 많은 것들을 나눌 수 있었을까? 역시 이것도 타이밍의 문제인가 보다.


 아무튼 이별을 하더라도 뭐 하나는 남는다. 그리고 나에게는 브로콜리너마저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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