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덕에 힘들어도 버틴다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다. 새로운 사람들보다는 원래 내가 잘 알고 지내는 친숙한 관계에 시간을 더 많이 쏟는다. 고로 발이 넓은 편도 아니며 인적 네트워크 확장에는 큰 관심이 없다. 특히나 결이 안 맞는 지인들과의 사교 모임에 억지로 참석해 억지로 리액션할 수 있는 성정도 못된다. 인간관계에 무심한 것 같이 들리겠지만 (실제로 나를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의외로 나는 인간관계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회사에서도 나를 가장 힘나게 하는 요소는 마음이 잘 맞는 동료들과의 관계이며, 회사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를 둘러싼 주변인들과의 소통에 활력을 얻는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을 법한 모임을 찾는 적극성을 기꺼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란 인간은 인간관계가 그다지 개방적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는 34년 살면서 최근에야 깨달은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개방성 낮은 성향으로 인해 나의 인간관계는 주로 연식이 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베스트프렌드라고 할 수 있는 가장 절친한 친구 두 명은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었으니 무려 20년 넘게 이어온 관계이고 (얘들아, 징글징글하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친구들이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혹은 알고만 있었으나 성인이 되고 나서 더욱 친해진 친구들이다.
오히려 대학 친구들은 그다지 많지 않고, 있더라도 대학 이전에 사귄 친구들만큼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다(몇 명 빼고). 고등학교 때까지는 내가 관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같은 반 동급생들이므로 자연스럽게 친해졌는데, 대학생 때는 내가 동아리든 학회든 나서야 하더라. 그때는 매사가 귀찮은 오춘기를 겪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사귈 기회도 그냥 흘려 보내고 말았다 (가장 후회되는 부분). 다만,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때 친해진 친구들은 여전히 서로의 근황을 챙기고 몇 년 전부터 계모임까지 하고 있는 절친한 친구들이다. 이처럼 나는 한번 친해지면 그 관계를 오래 이어간다.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 생각할 때 ‘친구’라 부르는 범위가 굉장히 좁은 편이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면 내 친구들은 대체로 나와 결이 비슷한 것 같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충분히 오래 할 수 있는 관계라거나, 혹은 웃음 포인트가 매우 비슷해서 남들은 안 웃는데 우리끼리만 깔깔대기도 한다. 너무 편한 사이다 보니 가끔 날 세워서 하는 이야기들에 상처받고 때로는 상처주기도 하지만, 그럴 때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과하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관계를 잃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들이 있어, 절대로 선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때 이후로는 친구들과 싸우거나, 아니면 기분이 상해서 관계를 ‘손절’ 한 적은 없다. 그의 반대도 잘 없다 (얘들아 고마워…).
30대 중반에 접어들었기에 사실 내 친구들 중 절반은 다른 라이프 스테이지를 살고 있다. 결혼을 했거나, 이미 일찌감치 해서 아이가 있거나. 생애주기가 달라진 친구들과 만나면 어쩔 수 없이 공통 관심사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체감한다. 가끔은 쉴 새 없이 나누던 예전의 수다가 그리워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근황을 존중하는 것, 친구의 아이 이야기나 나의 연애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고 리액션하는 것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지루할 때도 당연히 있다. 왜냐하면 나는 결혼을 안 했으니까! 그렇지만 친구의 이야기에 관심 없는 티 팍팍 내면 그건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말자는 것과 뭐가 다를까? 반대로 나의 연애, 소개팅 이야기를 친구가 귀 기울여 들어줄 때 무척 고맙다. 이처럼 각자의 상황을 기꺼이 배려할 용의가 있는 관계로 자리 잡았고, 이 또한 비슷한 애들이 ‘끼리끼리’ 놀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더 이상 나와 같지 않다고 느낄 때, 또는 서로의 이야기가 너무 달라져서 이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 혹은 반대로 상대가 이 관계를 더 이상 소중히 여긴다고 느끼지 못할 때 나는 대체로 뒤도 안 돌아보고 관계를 끊는 편이다. 친구 앞에서 투덜대거나 너 왜 그러냐고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냥 연락을 안 한다. 괜히 감정 소모하기도 싫고, 싫은 말을 잘 못 뱉어서 그렇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끊어진 관계가 성인 이후에 꽤 된다. 미성숙한 방어 기제의 한 부분인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끊긴 인간관계 중에 아쉬운, 후회되는 것들도 있다.
특히 고등학교 친구 중에 약 10년을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다. 서로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하는 편이었고, 친구가 의리가 있는 편이라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먼 거리를 달려와 주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고마운 일이 참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바쁘고, 그 친구도 바빠지면서 소원해졌는데 내가 힘들었을 때 오랜만에 그 친구에게 연락을 했던 게 결정타였던 것 같다. 친구 입장에서는 힘들 때만 연락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이 지나고 보니 너무 미안해서, 한 번 얼굴 보고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친구가 몇 개월이 지나 핸드폰 번호를 바꿨는데 나는 그 사실을 카카오톡 상태 메신저를 보고서야 알았다. 나라면 내가 핸드폰 번호를 바꿀 때 친한 사람들에게는 메신저든 문자든 먼저 해서 바뀌었으니 저장하라고 할 것 같은데, 그 친구는 아니었나 보더라. 소심하고 속 좁았던 나는 내가 그 친구의 ‘친한 바운더리‘ 안에 더 이상 속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고, 나도 그 이후로 그 친구의 전화번호와 카톡을 지우고 아예 관계를 끊었다. 사실 돌아보면 많이 후회된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 와서 많이 들기도 한다.
물론 친구 관계라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안다. 가까워지는 인연이 있으면 또 멀어지는 인연도 있는 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당연히 겪는 인생의 한 단면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와의 관계를 끊는 방식이 너무 미숙했다는 생각이 들어 후회된다. 인간관계에서 정말 수동적, 방어적이었구나 싶고.
작년 가을에 다른 한 친구에게서 4년 만에 연락이 왔다. 역시나 고등학교 때 친구였는데, 4년 전을 마지막으로 나나 그 친구나 자연스레 멀어졌다. 더 이상 만나도 할 이야기가 없어서 부러 연락을 먼저 하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4년 만에 갑자기 생각이 났다면서 연락이 왔는데, 사실 그 마음이 무척이나 반갑고 고마웠다. 누군가 나를 떠올린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표현해 준 것은 정말 귀한 마음이 아닐까? 먼저 연락해 준 것이 진심으로 고마웠었고, 나 역시 그 친구에게 기쁜 마음으로 올해 새해 인사를 건넸다.
올해의 목표는 ‘먼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지극히 수동형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인간이라 새해 인사도 잘 안 하는데, 이번에는 내가 먼저 새해 인사도 하고, 축하할 일이 있으면 작은 선물이라도 먼저 건네보았다. 이런 마음을 기꺼이 주고받을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은 진실로 고마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니 얘들아… 올해도 우리 같이 잘 보내보자… 그렇지만 솔로인 친구들아… 올해는 좀 덜 같이 놀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각자 좀 찾아볼 수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