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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un 16. 2020

넷플릭스보다 재미있는 고전 이야기

고전의 재味발견 :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Pride를 오만으로 번역한 이유가 의미심장하다.>

 고백하자면 고전을 자주 읽는 나로서도 여성 작가의 작품을 접해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니 그렇게 되었다. 오히려 이는 나의 세계관에 비추어 역차별에 가까웠지만 게으름 탓으로 돌려 애먼 누명을 씌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여성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어 그토록 유명한 <제인 에어><폭풍의 언덕>, <오만과 편견>이나 <분별력과 감수성>이 누구의 작품인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갑자기 궁금증이 폭발해 검색창에 마우스 화살표를 끌어 놓고 키보드를 난타해 몇몇 작품의 작가와 줄거리를 그제야 확인해 보았다. 그 결과 그나마 알고 있던 얕은 지식도 전부 허점 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얼굴은 이미 늦가을 달랑 하나 남은 홍시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확히 작가가 누구인지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한 작가의 작품일 것이라고 확신했던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이 각각 다른 작가의 작품임을 확인하고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매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또한 이들은 모두 영국 작가이고 <작은 아가씨들>루이자 메이 올컷은 미국 작가였다는 사실도 나를 초라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차라리 무관심했다고 생각하면 위로는 되겠지만, 무지를 부인하기에는 자존심(pride)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이 이 책에서 pride를 오만이라고 번역한 맥락이 아닐까?) 그나마 고전 읽기에 대한 나의 편식을 반성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하니, 이것이 작은 위로라도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나의 무지를 일깨워 준 계기가 된 것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을 접한 덕분이었다. 수도권 지역의 코로나 재발로 인해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었고, 이로 인해 뜻하지 않은 시간의 공백이 생기게 되어 한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고전으로 자연스럽게 손길이 닿았다.  그리고 마침 그 손끝에 이 책이 꽂혀 있었다. 

     

 <오만과 편견>은 두 권으로 출판해도 될 만큼 두툼한 책이다. 페이지 수가 무려 559에 달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기준) 두께만 보면 결코 쉽게 손이 가는 책은 아니다. 잉여의 시간 (누구에게나 24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지므로 잉여의 시간이란 말에는 모순이 있지만...)이 없었다면 읽을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 생긴 시간의 공백을 채우기에는 그만이라고 생각해 선뜻 골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첫 장을 펼쳐 읽은 후 오랜만에 책을 읽어 나가는 재미와 함께 남은(읽을) 페이지가 점점 적어진다는 사실에 크나큰 아쉬움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독서를 즐기는 편이지만 솔직히 어떤 책들은 읽는 내내 힘들고, 언제 다 읽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아이들의 독서환경 조성을 위해 가끔 의지와 상관없이 늦은 밤 독서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오만과 편견>을 읽을 때는 오히려 내가 가장 늦게까지 책을 읽었고,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기 위해 거실 전등을 꺼달라고 부탁할 때는 '이 페이지만 다 읽고 끌게' 하며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시간을 원망하기도 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너무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제인 오스틴이 1796~97년에 원작(당시 제목은 '첫인상'이었다.)을 집필하고, 1811~12년에 개작한 <오만과 편견>의 이야기 구조는 아무리 많이 반복하고 변주되어도 질리지 않는, 지금도 대중에게 엄청난 사랑과 지지를 받는 재벌 2세 (명망 높고 돈도 많은 귀족 가문)와 평범하지만 발랄하고 당찬 여성(시골 귀족으로 외모는 물론 전혀 평범하지 않다)과의 우여곡절 많은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명 신데렐라 플롯) 이러한 뼈대를 바탕으로 당시 영국 귀족의 사교 문화와 생활상을 통해 다양한 남녀의 로맨스를 재치 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특히 아들이 없는 귀족이 그 재산을 자신의 딸(들)이 아닌 가문 내에 지정된 다른 남자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한정상속' 제도가 주요 소재로 다루어지는데, 이는 당시 영국 (귀족) 여성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결혼'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신랄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시골 귀족 가문인 베넷 씨에는 다섯 딸이 있는데 그중 장녀 제인과 차녀 엘리자베스가 이 작품을 끌고 가는 주인공들이다. 제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맏딸 이미지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어 그 성품이 온화하고, 매력적이며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란 없다고 믿는 천사 같은 인물이다. 그녀의 외모는 어머니를 닮아 인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이 날 정도이다. 이에 반해 차녀 엘리자베스는 재기 발랄하고 당찬 여성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애써 숨기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만 경우를 아는 인물이다. 세속적인 어머니보다는 원칙을 지키는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는데, 아버지 역시 다른 어떤 딸보다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의 외모 역시 언니에게 결코 뒤처지지 않지만 언니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녀의 조력자 역할을 자처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막역한 사이이다. 


 어느 날 그녀들의 마을에 잘 생기고 능력 있는 귀족 청년 빙리가 이사를 온다. 그리고 그의 절친이자 그보다 더 명망 있는 가문에, 재산도 훨씬 많은 다아시라는 청년도 함께 왔다. 그들의 출현은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단연 최고의 화제가 되고 무도회에서 네 사람은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능력 있고 매력적인 데다 겸손하기까지 한 빙리는 모든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재산과 높은 신분을 가진 다아시는 시골 마을 사람들과 말을 섞고 가까이하기를 꺼리는 다소 오만한 태도 때문에 모두에게 지탄의 대상이 된다. 이 네 명 인물의 마음속에는 누가 있고, 사랑의 짝대기는 누구를 가리키게 될지, 또 어떤 난관을 겪고 그들은 자신의 운명적인 사랑을 성취하게 되는지를 재치 있는 대사와 현실적인 묘사로 풀어나가고 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역시 '엘리자베스'가 아닌가 싶다. '결혼'이라는 한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자신만의 당당함과 발랄함을 잃지 않는 그녀를 보면 사랑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도대체 눈뜨고 볼 수 없는 다아시를 어떻게 상대하는지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캐서린 영부인에게 얼마나 당차게 대드는지 읽는 내가 마음을 졸일 정도였다. 야생마 같은 그녀가 길들여지지 않으면서도 최고의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그녀에게서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인 오스틴 스스로가 '너무 가볍고 밝고 반짝거려서 그늘이 필요하다'라고 말할 만큼 이 작품은 밝고 명랑하다. 악인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위컴을 악인으로 봐야 할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 같지만) 요즘같이 답답할 때 시원하게 읽어 내려가기에 안성맞춤이다. 다시 말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있다.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하면 책을 읽는 내내 장면 장면이 마치 드라마처럼 머릿속에서 떠오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넥플릭스 못지않다. (나는 매우 그렇게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읽다가 빵 터져서 아내에게 읽어준 대목이 있다. 마지막으로 그 구절을 소개하면서 <오만과 편견>에 대한 짧은 독후감을 마치고자 한다. 


 '엘리자베스의 견해가 모두 자기 가족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더라면, 그녀는 결혼의 행복이라거나 가정의 안락에 대해 그다지 즐거운 상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젊고 아름다운 데다 마음씨도 착해 보이는 - 젊고 아름다우면 마음씨도 착해 보이게 마련이니 - 한 여인에게 반해 결혼하게 되었는데, 막상 결혼해 보니 머리도 나쁘고 마음도 꼭 막혀 있는지라 그녀에 대한 애정은 결혼 초기에 끝나버렸다. 존경, 존중, 신뢰는 영원히 사라졌고, 가정의 행복에 대한 그의 생각들도 모두 깨져버렸다.(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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