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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un 22. 2020

아내는 우리 집 진정한 가장

 미처가 (美妻歌) 제1장 : 매미나방 애벌레 천적의 탄생  

<올여름 눈에 많이 띄는 송충이 정체는 매미나방 애벌레다.>

온 가족이 오순도순 대지산에 오르다가

허공 위에 대롱대롱 송충이를 만났더니

큰 놈은 기겁하여 앞으로 달아나고

작은놈은 식겁하여 뒤로 내달리니

남겨진 나 의지할 곳은 아내뿐이라네

미처(美妻)가 발검하여  해충(害蟲)을 싹둑 베니

애처롭다 벌레여 추풍낙엽(秋風落葉) 신세라네

생이별한 가족 재회하여 용맹에 감탄하니

송충이 천적이 탄생함을 만천하에 고하네  

미처가 미처 (美妻歌 美妻) 

미처요 미처 (美妻謠 美妻)

(아름다운 아내를 노래하네 아름다운 아내를)

(아름다운 아내를 노래하네 아름다운 아내를)

 우리 집 가장은 아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물리적)으로도 그렇다. 결혼 후 치열했던 가장 쟁탈전에서 내가 패해 무릎을 꿇은 후, 17년간 패권(霸權)은 아내의 몫이었다. 준과 큐가 태어났고, 눈치 빠른 아이들은 말도 배우기 전에 비정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를 온몸으로 배웠다. 두 사람에게 적당하게 힘이 나누어져 있다면 다툼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생기지만,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강하니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가정의 평화는 그렇게 압도적인 강인함 속에 꽃을 피웠다. 


 그러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기 마련인 법, 가장인 아내는 집안의 세 남자가 해내지 못하는 일을 감당해야 할 때가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벌레' 잡기와 그 처리다. 자체 방역 시스템이 철저한 우리 집에도 가끔 벌이나 나방, 이름 모를 벌레가 종종 침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우리 세 남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 살려라 도망가기에 바쁘다. 준과 큐는 정말 기겁을 하고 도망친다. 물론 '시골' 출신인 나는 벌레를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는다. 벌이나 나방이 사람을 해칠 수 없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얼핏 보면 나도 도망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사실 놀란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그들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진정시키는 것이 아버지 된 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절대 벌레가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순간 아내가 등장한다. 혀를 끌끌 차며 티슈 한 장을 뽑아 와 보란 듯이 벌이나 나방을 제압했다. 크기가 제법 큰 놈들에게는 용맹한 아내도 한 장의 티슈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그럴 때면 두께감이 있는 물티슈가 필요하다. 휴지에 돌돌 말린 벌레들은 때론 창문 밖으로 내보내져 자유의 몸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그 안에서 형체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으깨지기도 한다. 물론 그런 처리 방식에도 나름 아내의 원칙이 있다. 우선 해충인지 아닌지가 그 첫 번째고, 세 남자를 얼마나 소란 떨게 하느냐가 그 두 번째다. 소란의 규모가 클수록 처벌은 가혹했다. 


 수영과 스피닝 바이크로 매일 체력단련을 하던 아내가 코로나 19로 실내 운동이 불가능해지자 대지산과 불곡산을 잇는 10km 국토횡단 코스로 전환을 했다. 나도 아이들도 시간이 날 때마다 아내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5월 들어서면서 유독 많은 송충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이 시기에 몇 번쯤은 마주치게 되는 벌레였지만, 다른 해보다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아내는 녹색창을 재빠르게 검색해 그놈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송충이를 닮은 이 벌레의 정체는 독나방과에 속하는 '매미나방 애벌레'였다.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다면 매미나방 애벌레는 잡식성 해충으로 모든 나무에 피해를 주었다. 전문가들은 지난겨울 유난히 따뜻했던 날씨 때문에 개체수가 죽지 않고 많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추정했다. 게다가 매미나방 애벌레의 털에는 독이 있기 때문에 등산객의 피부와 접촉하면 두드러기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어 시민들의 피해까지도 예상이 되었다.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측은 화학 살충제를 뿌리면 자칫 생태계를 파괴할 수도 있어 관리사무소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잡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아내의 쾌검에 나가떨어지는 매미나방 애벌레들. 그 검 끝에는 조금의 자비심도 없었다.> 

 이런 뉴스를 접한 후 아내는 대지산과 불곡산에서 매미나방 애벌레를 발본색원(拔本塞源)하기 시작했다. 보통 10km 코스를 온 가족이 함께 걸으면 선발대인 아내와 후발대인 세 남자의 도착 시간은 길게는 30분 이상 차이가 났다. 특히 아이들이 함께 하면 아내는 더욱 가속도를 냈다. 아내는 등산스틱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보통은 물도 잘 마시지 않았다. 아내에게 10km 등산코스는 無스틱 無음료로 가능한 가벼운 몸풀기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매미나방 애벌레를 잡기 시작하면서 아내의 걸음걸이는 매우 느려졌다. 한 손에는 등산스틱도 들었다. 내딛는 걸음마다 눈에 띄는 매미나방 애벌레를 스틱으로 베어 버리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나에게는 아내의 그 모습이 마치 검을 뽑아 적을 베어 버리는 무사의 모습처럼 보였다. 아내가 검을 한번 휘두르면 적들은 순식간에 두 동강이가 났다. 그렇게 10km를 돌고 나면 보통 아내는 60마리 정도의 매미나방 애벌레를 해치웠다. 물론 나와 아이들은 아내의 용맹함에 찬사를 보냈지만 정작 누구도 그 선한 행동을 함께하지는 못했다. 사실 도망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발전이었다.


 아내는 그렇게 산에 오를 때마다 사명감을 가지고 해충을 제거했다. 그런 덕분인지 지난 주말에 산에 오를 때는 매미나방 애벌레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가장님의 노력 덕분이라고, 이 정도면 경기도에서 '올해의 도민상' 정도는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는 묵묵히 걸으며 마지막 한 마리까지 제거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런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듬직함을 느꼈다. 역시 아내는 우리 집의 진정한 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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