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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ul 16. 2020

세상 모든 부조리에 대한 저항

고전의 재味발견 : 페스트 (La Peste)

<표지그림은 에드바르트 뭉크의 '죽음의 침대'이다.>

 카뮈의 <페스트>를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 11일이었다. 작품 해설 부분을 포함해 약 440여 페이지를 모두 읽고 책을 내려놓은 날짜는 7월 11일, 약 두 달간 이 책과 씨름했다. 물론 그사이에 <어린 왕자>나 <플랜더스의 개>처럼 어린 시절에 읽어 본 듯하나, 실제로는 읽어 보지 않았던 명작 동화를 찾아 읽기도 했고, <오만과 편견>과 같은 새로운 작품을 경험하기도 했다. 책의 면지에 칼 세이건의 <에덴의 용>을 읽고 '지끈지끈해진 머리'를 좀 식힐 겸 다음 책으로 <페스트>를 선택했다고 썼는데, 5월 11일로 돌아간다면 이런 선택을 한 나를 흔들어 말릴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읽었던 <이방인>과 다르게 <페스트>는 내게 너무 어려운 소설이었다. 어렵다는 말로는 이 책을 대하는 복잡한 심경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지만 당장 이보다 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페스트>는 여러 방면에서 내 부족함을 일깨워 준 참으로 고마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맞습니다. 약간 비꼬는 말투입니다.)   

  

 <만들어진 신>, <이기적인 유전자> 그리고 <생각의 탄생> 같은 책들은 읽다가 포기한 채로 몇 년째 책장 어딘가에서 깊이 잠들어 있다. 다소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기도 했고, 지적 능력과 사고의 유연함을 상당히 필요로 했던 터라 몇 차례 도전 끝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페스트>도 소설 부분에서 처음으로 읽다 포기한 작품이라는 오명을 쓸뻔했다. (그러고 보니 '그리스인 조르바'는 3년째 읽고 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재미없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각각의 등장인물이 페스트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흥미로운 작품임은 분명했다.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까뮈의 작품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나’의 문제라기보다는 ‘외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해진다. 그런 치졸한 생각으로 번역의 문제라 치부하고 잠깐이지만 마음의 평화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 벅찬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이방인>과 동일한 번역가가 <페스트>도 번역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번역도 문학의 한 장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본이기에 번역의 문제로 떠넘기기에는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실의 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은 가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었던 것은 성자가 될 수도 없고 재앙을 용납할 수도 없기에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리유의 태도, 사회(공권력)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모든 폭력(사형제도)에 저항했던 타루의 의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그 정도의 소명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지 않았던 그들처럼, 일단 소설의 마지막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오랑시가 페스트로부터 ‘상처’뿐인, 하지만 값진 승리를 이뤄낸 것처럼, 나도 완독 했다는 작은 성취감과 함께 위대한 작품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해야만 했던 것이다. 


 <페스트>는 연대기로 객관적이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서술자가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작품을 읽는 내내 과연 서술자가 누구일까 궁금해지는데 작품 말미에 가서야 정체가 비로소 공개된다. 배경이 되는 오랑은 알제리의 해안 도시로 못생기고 중성적인 곳이다. 바다를 끼고 있지만 등지고 있는 까닭에 일부러 찾아가야만 그 바다를 볼 수 있고, 언덕들에 둘러싸인 채 헐벗은 고원 한가운데 자리 잡은 고립된 도시이다. 오랑의 시민들은 권태에 절어 있으나 돈에 관심이 많다. 솔직하고 붙임성 있고 활동적인 주민들은 여행자들의 마음속에 지각 있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다소 건조하게 느껴지는 이 도시에서 쥐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사건과 함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후 이야기의 실타래는 페스트를 대하는 등장인물의 다양한 태도를 통해 전개된다. '치료'로서 페스트에 반항할 수밖에 없는 의사 리유, 파리에서 취재 차 오랑에 들렀다 고립되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랑(아내)을 찾아 '도피'하려는 기자 랑베르, 가혹한 전염병을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려는 파늘루 신부, 완벽한 문장을 쓰고 싶은 몽상가이자 자기 소임에 충실한 말단 공무원 그랑, 사회가 가하는 어떠한 죽음에도 반대하는 활동가이자 관찰자 타루,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자살을 시도하고 모두가 질병 속에서 불행할 때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 범죄자 코타르는 각자의 방식으로 페스트로 고립된 도시에서 살아 나간다. 이렇게 이야기 초반에 각자 흩어져 있던 인물들은 사망자가 늘어나고, 도시가 생명력을 잃어가자 자발적인 '보건대'를 조직하여 필사적으로 페스트에 저항한다. 리유와 타루, 그랑과 코타르는 물론 도시를 탈출할 수 있었던 랑베르도 마지막 순간에 보건대에 합류하고, 신의 대리인인 파늘루 신부조차도 어린아이의 고통스러운 죽음 앞에서 보건대 합류를 결심하게 된다. 이는 작가가 전쟁이나 질병과 같은 사회의 모든 부조리의 상징인 페스트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반항 (또는 저항) 밖에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카뮈는 처음부터 계획이 다 있었다. 작가는 세계를 보는 시선을 3개의 층위로 나누어 작품을 구상했다. 우선 부정(否定)을 표현하기 위해 <이방인>을, 긍정을 표현하기 위해 <페스트>를 썼다. 그리고 다음으로 사랑의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작품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에 대한 작품은 쓰이지 못했다. 그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작가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가 기존의 작법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쓰인 <이방인>의 출현을 '건전지의 발명'과도 같다고 극찬했고, 노벨 문학상 위원회로부터 '오늘날 인간의 의식에 제기되고 있는 제반 문제들에 빛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평가받았던 그의 사랑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 뫼르소처럼, 타루처럼 카뮈 역시 생을 불태우다 너무 일찍 전소되어 버렸다.   


 전 세계가 코로나로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는 지금 시기에 <페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조금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카뮈가 7년 여를 집필에 매달린 끝에 1947년에 출간한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오랑과 2020년 코로나라는 미증유의 전염병을 대하는 전 지구적 상황이 상당 부분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부조리이며 아이러니다. 감염 경로가 밝혀졌는데도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자랑하듯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력한 사회적, 물리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시점임에도 다양한 이유로 밀폐된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사람들도 있다. 이런 몇몇 철없는 어른들로 사회 전체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고, 실제로도 큰 위협이 되기도 했다. 천만다행인 점은 작품 속 보건대처럼 각국의 의료진들이 자기 몸은 돌보지 않고 오히려 목숨을 내놓고 코로나와 맞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희생과 성실함이 없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더욱 불행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 의료진과 질병관리본부, 그리고 약사님들께 이 기회를 통해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우리 사회가 그분들의 참된 성실함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보답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리유와 랑베르의 대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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