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사랑과 닭백숙으로 튼튼하게 자란 첫째 외손녀
하루는 메일 주소를 보내라는 삼촌 문자를 받았다. 가족 에세이 프로젝트나 뭐라나. 메일을 확인하고는 눈앞이 캄캄했다. 초등학교 때 일기 써보고 글이라는 걸 써본 적이 없었다. 뜬금없이 할머니에 대한 글쓰기를 하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일을 받은 날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뒤죽박죽 떠오르는데 정작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고 시간만 덧없이 흘러갔다. 글은 잘 쓰고 있는지 삼촌 문자를 받기라도 하면 생각은 더 많아졌지만, 글은 더 쓸 수 없었다. 정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큰 손녀딸로서 잘 쓰고 싶다는 심리적 부담감도 컸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온다. 자식 여섯을 낳고 키우셨는데, 나를 포함해 손주들까지 돌봐주셨다. 할머니의 이마에 깊게 팬 주름 중 몇 개는 나 때문에 생긴 것인지도 몰랐다.
엄마는 할머니 딸들 중에 유난히 몸이 약했다. 어릴 적에 엄마가 너무 아파서 할머니 손에 자란 나는 첫 번째 손녀다. 다른 손주들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 할머니 댁은 요선 터널 위에 있었다. 지금은 터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번듯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지만, 그때는 변두리 가난한 동네였다. 그래도 할머니 댁은 꽤 넓었다. 방도 여러 개에 마당도 넓었다. 진한 갈색 마루가 놓여 있었고, 빨갛고 큰 대야가 놓인 수돗가도 마당 한가운데 있었다. 재래식 화장실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거기 갈 때마다 무서워 벌벌 떨었다. 밭에서는 자두나무며 사과나무가 자랐고, 봉숭아꽃도 잔뜩 피었다. 엄마와 떨어져 살았지만 할머니 댁에서 흙장난을 하며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 내 별명은 원뚱이었다. 원 씨 성(姓)에 뚱뚱한 아이라는 의미였다. '뚱뚱'보다는 '통통'에 가까웠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할머니와 엄마의 대를 이어 미모가 남달랐으니까.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어린 나는 먹성이 남달랐다. 어린아이가 라면 한 개를 거뜬히 해치웠고, 국물에 밥 한 공기를 말아 싹 비웠다. 지금도 어디 가면 운동선수 출신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이게 전부 어릴 적 왕성한 먹성 덕분이었다. 할머니 손맛과 맛있는 음식들이 내 식욕을 자극한 범인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닭백숙'이 있었다. 아이들이 잘 먹지 않는 닭 껍질을 유난히 좋아했다. 할머니가 백숙을 끓이시면 닭 껍질은 모두 내 차지였다. 푹 삶은 백숙을 쟁반에 담아 살을 발라낼 때면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내 입에 닭 껍질을 쏙쏙 넣어주셨다. 행여 뜨거워 입이 데지는 않을까 꼭 할머니는 입에 먼저 대보고 주셨다. 첫째 손주이기도 하고, 내가 유난히 예쁘기도 해서 할머니는 어디에 가시든지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할머니 아니면 나를 봐줄 사람도 없었다) 특히 여러 친목회에 많이 따라갔는데 그때도 항상 단골 음식은 닭백숙이었다. 큰 솥에 삶은 닭에서 다리 하나를 뚝 떼어 내게 주시곤 했는데 정말 게 눈 감추듯 금방 먹어 치웠다. 그 시절에는 주전부리가 따로 없었다. 막대사탕이나 과자보다 닭다리를 더 많이 먹었다. 할머니가 집에서 해준 닭발, 닭똥집도 내게는 훌륭한 군것질거리였다.
할머니의 음식 중에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건 감자범벅이다. 피난살이 음식이라고도 불리는 감자범벅은 감자와 밀가루를 뒤섞어서 만드는 볼품없는 음식이다. 그런 음식도 할머니 손을 거치면 투박하지만 특별한 맛이 났다. 언제나 어른처럼 큰 대접에 듬뿍 담아 먹었다. 어린아이가 그런 음식을 좋아하는 게 기특하기도, 신기하기도 하다며 할머니는 감자범벅을 자주 해 주셨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덕분인지 못 먹는 음식도 거의 없었다. 편식은 몰라도 편육은 잘 안다. 친구들이 내가 먹는 모습을 보면 참 복 들어오게 잘 먹는다는 말을 많이 했다. 할머니는 가리지 않고 뭐든지 잘 먹으면 다 키(신장)로 간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나는 전부 살(체중)로 왔나 보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얘기지만, 먹은 만큼 키로 갔으면 미스 코리아라도 나갔을 텐데 살짝 아쉽긴 했다.
할머니는 지금도 미용실에 머리 하러 오시면 옛날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그때마다 반복되는 할머니만의 레퍼토리가 있다. 벌써 수백 번도 넘게 들었다. 어릴 적에 엄마가 아파서 몇 년 동안 할머니가 나와 동생을 키워주셨다. 그러다 엄마가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나를 엄마한테 데려다준 할머니는 그간 키운 정과 섭섭함에 선뜻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이렇게 말했단다.
“할머니, 콜라 한 잔 마시고 빨리 집에 가.”
할머니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 앞에서는 담담하게 돌아섰다. 우리 집을 나와 할머니 댁까지 갈어가는 동안 내내 우셨다고 했다. 어린 내가 뭘 알아 한 말은 아니었지만,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죄송한 마음이야 백 번 천 번 사죄해도 할 말이 없지만, 똑같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셔서 미용실 손님도 다 알게 되었다. 마지막 말은 항상 “키워줘도 소용없다.”였다. 그럼 나는 “할머니 그럼 이제 공짜 머리 안 해줘요.”라고 받아친다. 할머니도 웃고 나도 따라 웃었다.
할머니 손맛과 보살핌으로 자란 내가 벌써 마흔 살이 되었다. 20대 후반쯤 할머니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다. 병원에 할머니 간식이라도 사다 드리려고 갔는데 힘없이 누워 계신 할머니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언제나 활기차고 건강하던 할머니가 처음으로 늙고 힘없어 보였다. 그게 너무 속상했다. 지금도 그때 할머니 모습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그날 이후로 할머니가 늙지 않게 해달라고 믿지도 않는 신께 빌었다. 언제나 건강한 모습 그대로 오래도록 우리랑 같이 지내면 좋겠다. 가끔 손님들이 할머니 연세를 물어보면 “아직 젊으세요, 청춘이에요.”라고 대답한다. 할 수만 있다면 흘러가는 세월을 튼튼한 내 두 손으로 꽁꽁 묶어 버리고 싶다. 아직 할머니와 함께 먹고 싶은 음식이, 함께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그리고 아직 이 말도 하지 못했다. 고맙고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