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동안 한 지붕 아래서 미우나 고우나 함께 울고 웃은 넷째 외손자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의 추억, 할머니에 대한 여러 기억이 때로는 어렴풋이 때로는 생생하게 스쳐 지나간다. 할머니가 지내시던 방안의 풍경, 증조 외할머니와 이야기 나누시던 모습, 다섯째 이모 결혼식 전 함 팔러 온 이모부 친구들이 할머니 집에 들어와 시끌벅적했던 순간 등등. 무엇보다 어린 시절 놀러 가면 작은 내 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시던 할머니의 따뜻한 품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는 많은 손주 중 유일하게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할머니 손주라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2~3년 할머니네 집에서 자랐다. 내 경우는 결혼해서 분가하기 전까지 22년을 위·아래층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행복하고 좋은 기억도, 슬픈 기억도, 때론 떨쳐버리고 싶은 기억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흔적을 남겼다. 할머니와 함께 살다 보니, 명절이나 생신 같은 특별한 날마다 친척들을 비롯해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이따금 찾아온 다른 손주들에게 할머니가 더 살갑게 대할 때면 어린 마음에 섭섭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이런 마음 때문인지, 매일 만나는 사이라 그런지 나도 할머니에게 곰살맞게 구는 손주는 아니었다. 무뚝뚝한 손주였다.
사춘기가 빨리 찾아온 걸까?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사람이 많은 자리를 피했다. 아무도 그렇게 대하지 않았는데 혼자서 위축됐다. 그럴 때마다 손주가 걱정되셨던 할머니는 외삼촌을 내려보내시거나 직접 아래층까지 내려오셔서 같이 밥 먹자고 챙기셨다. 다 함께 밥 먹는 자리가 정말 싫었다. 알아서 먹겠다고 퉁명스럽게 할머니를 밀어냈다. 돌이켜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다. 혼자 있는 손주 따뜻한 밥 한 끼 먹이려고 결코 적지 않은 연세, 건강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나를 데리러 아래층까지 오신 할머니께 해서는 안될 행동이었다. 참 부끄러운 기억이다.
군대를 전역하고 경찰시험을 준비했다. 뭔가에 쫓기듯이, 혼자 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다. 할머니는 공부하는 모습에 안타까워하셨지만, 한편으로는 기특하다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딸들과 동전 치기 화투가 유일한 낙이었던 할머니는 공부에 방해될까 봐 1층에서 2층으로 장소를 옮기셨다. 그런가 하면 평생 종교 없이 사시던 할머니가 손주의 합격을 위해 생전 처음으로 할아버지와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해 주셨다. 할머니 기도 덕분이었을까? 나는 단번에 합격했다.
합격자 발표가 나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가 할머니에게 소식을 전하자 그렇게 기뻐하실 수 없었다. 그 생생한 표정이 지금도 기억난다.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내 일처럼 기뻐해 주시는 할머니를 보니 공부하느라 고생했던 시간들이 보상되는 듯했다. 아빠 없이 자란 손주 걱정으로 속이 많이 상하셨을 텐데, 이제야 그 짐을 조금 덜어드린 것 같았다.
합격하고 얼마 후 할아버지,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저녁 먹으며 소주 한잔했다. 태어나 처음이었다. 사실 한없이 사랑을 주셨던 할머니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마음 한구석에는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중학교 입학을 앞둔 엄마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어머니는 중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엄청 우셨단다. 그때는 어머니도 어린 소녀였을 텐데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자식을 중학교에도 못 보내는 할머니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은 하면서도, 자식들 중에서 유일하게 중학교도 못 나온 어머니가 불쌍했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던 걸까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원망했다. 두 분은 그때를 생각하며 말을 잇지 못하셨다. 할머니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내내 우셨다.
그때 내가 본 할머니는 내 어머니의 어머니였다. 딸을 향한 죄책감으로 평생 마음고생하신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할머니 젊은 시절 사진을 본 기억이 있다. 미모의 여인이 할머니라니 믿기지 않았다. 그 젊은 여인은 이른 나이에 결혼해 자식을 여섯이나 낳고 고된 시집살이를 하며 없는 살림에 자식을 건사하셨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머니는 자매들과 떨어져 친척 집으로 보내졌고 긴 시간 따로 떨어져 자랐다. 할머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어머니를 울렸고 내 마음속 원망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오래도록 묵은 앙금이 눈물로 흘러 사라졌다.
결혼하고 따로 살게 되면서 매일 보던 할머니를 자주 뵙지 못한다. 바쁘다는 말이 핑계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죄송스러운 마음뿐이다. 운전 조심해라, 밥은 잘 먹고 다니니, 안 먹었으면 2층에서 먹고 가라, 매일 듣던 할머니 정겨운 목소리가 유난히 그립다.
길다면 긴 22년을 함께 살면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셨던 나의 할머니, 여자 몸으로 혼자 자식 둘을 키운 당신의 딸이자 내 어머니를 항상 옆에서 격려해 주시던 나의 할머니, 여자 친구(지금 아내)도 그렇게 이뻐해 주시고 '여자한테 잘해'라며 생활의 지혜를 가르쳐주신 나의 할머니. 이제 아이가 생겼으니 명절이나 생신날, 어버이날에 아이와 함께 할머니를 뵈러 가야겠다. 내 아이도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면 좋겠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할머니에게 사랑한단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부끄럽지만 글로나마 전하고 싶다.
"증손자가 커가는 모습까지 할머니와 오래도록 함께 나누고 싶어요, 나의 할머니 항상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다른 손주들이 있을 땐 하지 않는 나만의 할머니 부르는 방법이 있다. 내일 아침 마침 비번이니 일찍 퇴근해서 할머니에게 아침밥 좀 주세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