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엄마가 그립다

독한 손녀, 공부 잘하는 딸, 딸 잔소리 듣는 엄마가 된 넷째 딸

by 조이홍

막내 남동생이 엄마 생신 기념으로 가족들에게 ‘엄마 이야기’를 글로 쓰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동생이 내준 숙제를 하고 싶지 않았다.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좋은 추억보다 힘든 기억이 많아 싫었다. 아픈 상처들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게 싫었다. 가난하고 배고픈, 행복하지만은 않은 시절이었다. 남동생 사주에 계속 독촉 문자를 보내는 큰딸이 무서워 마감 기한이 훌쩍 지난 지금 엄마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어린 나는 그 많던 빨래를 혼자 해냈다.>

엄마 이야기에는 할머니가 제일 먼저 등장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할머니가 악역이다. 할머니는 당신의 손녀들을 그냥 남처럼 대하셨다. 사랑으로 품어야 할 가족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간식을 큰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장롱 위에 올려놓고 손자에게 줄 때만 내려놓으셨다. 가끔 손녀들에게도 콩고물이 떨어졌지만, 나는 상처 받은 자존심 크기만큼 할머니를 밀어냈다. 공부를 꽤 잘했지만, 칭찬받기보다 눈치를 보던 여자아이였다. 팥쥐 집에 얹혀사는 콩쥐처럼 할머니 앞에서 큰 대야 가득 빨래를 의기양양 해내던 독한 손녀였다.


할머니는 딸을 많이 낳은 엄마를 괴롭혔다. 어린 마음에도 엄마는 보호해줘야 할 연약한 존재였다. 할머니를 미워했고 할머니도 그런 나를 미워했다. 몸이 약했던 나에게 엄마가 인삼 한 뿌리 사주려고 했을 때 엄한 표정으로 말리던 할머니 모습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여자가 대학 나와서 무슨 소용 있냐고 시도 때도 없이 말씀하셨던 고지식한 할머니. 다행히 엄마도 할머니만큼 고집 있는 분이라 없는 살림에도 문제집을 꼬박꼬박 사주면서 딸을 대학에 보내셨다. 나도 악착같이 공부했다. 할머니는 내가 남녀평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해 준 반면교사셨다. 독한 여자와 결혼한 우리 신랑이 고생이 참 많다. 하얀 모시 한복을 입고 서울 나들이를 자주 다닌 멋쟁이 할머니. 내가 애교 많고 싹싹한 손녀였다면 할머니랑 친할 수 있었을까? 엄마와 나에게 남다른 결속력을 갖게 해 준 할머니는 내가 할머니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다. 한이 응어리져 눈물이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많이 울었다. 그 눈물의 의미를 나조차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에게 열녀문을 세워줘도 모자랄 지경에 아빠는 할머니보다 열 배는 더 못되게 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엄마도 깡이 있어 당하지만은 않았다. 술에 취해 막말을 하는 아빠에게 아침이 되면 제대로 갚아주었다. 그 작고 여린 몸 어디에 그런 용기를 숨기고 있었을까! 생활력 강한 엄마는 남의 밭일을 하고 채소나 품삯을 받아 오기도 했다. 국민학교 저학년 때 엄마가 배를 타고 무밭에 품 팔러 갔는데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애타게 기다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엄마도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있었는데, 아빠가 숙직할 때마다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렸다. 술도 한잔하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귀가하곤 했다. 온 가족이 자고 있을 때 혼자 조용히 나와 요선 터널 위에 앉아서 엄마를 기다렸다. 어린아이가 겁도 없었다. 오히려 이대로 엄마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아빠한테 들켜 싸우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엄마가 실컷 놀고 연애도 하고 그랬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엄마도 젊었고 살아야 했으니까.


꽃같이 예뻤던 엄마 얼굴이 여느 할머니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한 데 나는 아직도 어느 초겨울 엄마 옆자리를 차지한 두 동생이 얄밉고 그 자리를 탐내던 어린아이 마음으로 엄마를 그리워한다. 그 시절 젊은 엄마가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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