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아이가 청년이 되다

할머니를 닮고픈 아홉째 외손자

by 조이홍

어릴 적 나는 겁 많은 아이였다. 부모님이 맞벌이하셨는데, 아빠는 타지에서 일하시느라 며칠씩 집을 비우셨고, 엄마는 종종 야간 근무를 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에 퇴근했다. 두 살 터울 동생과 나, 단둘이서만 잠을 자는 날들이 많았다. 어린 시절 밤은 너무 길고 무서웠다. 낮에는 그토록 비좁아 보이는 집도 밤이 되고 불을 끄면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어둠이 두려웠고 적막함이 무서웠다. 밤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이제 이가 좋지 않아 땅콩 캐러멜을 안 드신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동생과 함께 뛰어갔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비상금으로 아껴둔 돈으로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땅콩 캐러멜을 한 봉지 샀다. 어린 마음에 그냥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싫어하시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걱정과는 반대로 할머니는 언제나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아무리 늦은 밤이어도 저녁밥은 챙겨 먹었는지 살뜰히 챙기셨다. 할머니는 손주들이 왜 그토록 늦은 시간에 찾아왔는지 훤히 꿰뚫고 계셨다.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동생과 내 잠자리를 안방에 마련해 주셨다.


할머니 옆에서 잘 때면 무서운 생각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어 편안하게 잠들었다. 할머니는 불을 뿜는 용으로부터, 저승에서 낫을 들고 온 사자로부터 그리고 옷장 괴물로부터 우리 형제를 지켜 주셨다. 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언제라도 뛰어가 안길 수 있는 할머니가 있어 조금씩 사라졌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막연한 두려움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그러자 할머니 댁을 찾아가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명절 때 온 가족이 모일 때나, 타지에 사는 외삼촌이나 넷째 이모가 내려왔을 때 겨우 한 번씩 할머니 댁에 들렀다. 오랜만에 만난 손주에게 할머니가 가장 먼저 물어보는 말은 언제나 '밥 먹었어?'였다. 안 먹었다고 하면 부엌에서 금방 이것저것을 챙겨 밥상 한가득 내오셨다. 할머니가 도깨비방망이를 휘둘러 뚝딱하고 만들어 주신 된장찌개나 두부조림은 언제나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물론 나뿐만은 아니었다. 할머니 손을 거친 모든 식구들이 할머니 음식을 정말 좋아했다.


학원에서 수학 보조 강사로 첫 아르바이트를 했다. 열심히 일해 받은 첫 월급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되었다. 그동안 우리 형제 키우느라 고생한 부모님께 용돈부터 드렸다. 쥐꼬리만큼 적은 월급, 부모님께 용돈 드리고 나니 남은 게 별로 없었다. 치킨 한 마리를 사들고 할머니 댁에 들렀다. 할머니가 베푼 사랑에 비하면 보잘것없어 손이 부끄러웠다. 그저 평범한 치킨 한 마리뿐이었는데 할아버지, 특히 할머니는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세상 부러울 거 하나 없다는 미소를 지으셨다. 겁쟁이 손자가 언제 이렇게 커서 직접 번 돈으로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챙기냐며 기특해하셨다. 치킨값은 고작 2만 원도 하지 않았는데, 할머니는 손에 5만 원짜리 지폐를 쥐여 주셨다. 계속 받지 않으려 하자 어른이 주는 건 받아도 된다고 화를 내셨다. 손자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단 몇 푼이라도 당신들을 위해 쓰는 것이 안쓰러우셨던 게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가 주신 돈을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두 분이 베풀어주신 사랑에 비하면 치킨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음에 월급 받으면 제대로 효도해야지 작정하고 집까지 뛰어 왔다. 그렇게 할머니 사랑은 세심한 곳까지 끝이 없었다.


할머니는 앉으나 서나 자식들, 손주들 걱정이다. 언제나 가진 것보다 더 내어주려고 하신다. 공부하다 힘들어 할머니 댁을 찾으면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이해주며 또 뚝딱 한상 차려주시는 우리 할머니. 길지 않은 사회생활을 통해 인간관계에서 주기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았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할머니와 손주 사이라면…. 하지만 나는 안다. 할머니는 기꺼이 손주를 위해서도 가진 것 전부를 내어주실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할머니가 존경스럽고 사랑스럽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다. 그래도 할머니를 닮으려고 노력해볼 작정이다. 언젠가 주는 사랑의 기쁨을 깨달을 때까지. 우선은 할머니께 시도해보려고 한다. 그러니 우리 할머니, 아홉째 외손자가 드리는 사랑 오래오래 받을 수 있게 항상 건강하셔야 해요. 사랑해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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