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게 가족의 의미를 배운 열한째 외손자
어릴 적 나는 천진난만한 꼬마였다. 이건 내 입장이고 남들한테는 버릇없는 아이로 비췄을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댁에 가면 누군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형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고,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였으므로 나 자신 이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부족한 것 없는 삶을 살아서 그런지 친척들에게도 별 관심이 없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 맛있는 밥을 차려주는 사람 정도였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고, 중학생이 되자 철부지도 조금씩 철이 들었다. 다행이었다. ‘친척들에게 잘못하고 있구나.’ 깨닫는 순간이 있었다. 지금까지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을 만든 사람, 항상 밝은 미소로 맞이해주던 사람, 비로소 할머니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춘천에서 올라오신 할머니가 주방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만드는 모습을 보았다.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 할머니는 손주들을 위해 주무시지도 않고 음식을 만드셨다. 혹여 손주들이 깰까 살금살금 움직이시고 숨소리도 내지 않으셨다. 연세가 많으셔서 수원까지 버스 타고 오는 것도 할머니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졸리고 피곤하실 텐데 늦은 시간까지 바쁘게 음식을 만드시는 모습에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그동안 우리를 위해 만들었던 그 많은 반찬이며 국은 그냥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게 아니었다. 손주들에게 더 좋은 음식, 더 건강한 음식을 먹게 하려고 고생한 할머니 덕분이었다. 누군가의 노력이 없었다면 결코 맛보지 못했을 음식들을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 고마운 마음을 품은 적도 없었다. 그날 이후 할머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반찬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할머니 노력과 정성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다. 할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에서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가 되었다.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은 두부조림이다. 맵고 단 정도의 조화가 궁극의 맛을 이루었다. '매콤달싸름하다'라는 우리 가족만의 신조어도 만들었다. 어머니께 만들어달라고 여러 번 부탁해 보았지만, 막상 먹어보면 할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을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 명절 때나 생신 때 할머니 댁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두부조림은 언제나 넉넉하게 먹을 수 없었다. 나 말고도 친척 형들 모두 할머니 두부조림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했다. 입 짧은 나도 두부조림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비웠다. 어머니도, 이모들도 따라 할 수 없는 할머니 요리 비결이 정말 궁금했다. '사랑과 정성'은 기본이겠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더 있다. 다음에 춘천에 가면 할머니께 그 비결을 꼭 여쭤봐야겠다.
한때 나에게 명절이란 그저 학교, 학원을 가지 않는 날이었다. 휴일이기 때문에 좋았고 그날만큼은 마음껏 쉬겠다는 욕심만 가득했다. 그런 내게 할머니 댁은 쉬는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딱히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두커니 텔레비전만 보다가 낮잠 자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커지면서 명절의 의미도 달라졌다. 단지 쉬는 날이 아니라 친척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공부하느라 쌓였던 스트레스도 푸는 특별한 날이 되었다. 내가 마음을 바꾸자 다섯 명뿐이던 우리 가족이 어느새 수십 명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항상 나에게 안방 텔레비전을 양보해 주셨다. 시간대마다 늘 보시던 드라마가 있었는데 손주를 위해 기꺼이 리모컨을 양보하셨다. 텔레비전을 보면 어느새 할머니는 안방에서 나가시고 혼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방해될까 봐 소리 없이 자리를 피해 주시는 할머니를 보며, 손주를 위하는 마음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평생 자신의 것을 양보하고 포기하셨다. 자식들, 손주들의 행복이 할머니 것 인양 사셨다. 할머니 희생 덕분에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가끔은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사시는 할머니가 걱정되었다.
할머니가 더는 포기하지 않으시면 좋겠다. 자식들이 손주들이 해드리는 음식, 사드리는 음식도 맛있게 드시면 좋겠다. 남이 아닌 할머니 행복만을 생각하며 사시면 좋겠다. 우리 할머니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할머니가 밝고 건강하게 사시는 모습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 할머니의 비법 두부조림도 실컷 먹으며 그동안 만들지 못했던 예쁜 추억들을 하나씩 하나씩 함께 쌓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