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닮아 아내만 바라보는 사랑 바보 막내아들
엄마 고향은 경상남도 함양이다. 엄마의 고향은 내게 너무 낯설다. 우리 집은 외가 식구들과 거의 왕래가 없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다. 어려서 기억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군대 전역하고 처음으로 엄마와 함께 엄마 고향을 찾았다. 엄마보다 머리가 더 하얗고 삶의 노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주름 많은 이모도 그때 처음 뵈었다. 엄마와 닮은 듯 닮지 않은 이모가 신기하기도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전 국토가 하루 생활권이라는 말도 구시대의 유물이 된 요즘, 물리적인 거리 때문이 아니라 무뎌진 마음 때문에 엄마는 고향과 떨어져서 지냈다. 시아버지 병시중하느라, 시어머니 호된 시집살이를 연약한 몸으로 버티느라, 철없는 어린 시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엄마는 조금씩 고향과 멀어졌다. 적지도 않은 5녀 1남 자식들을 줄줄이 낳고 돌보느라, 남편의 박봉만으로는 자식들 건사하기도 힘들어 다라이에 과일이며 채소를 떼어다 파느라 엄마는 고향과 영영 생이별했다. 엄마가 어린 시절 뛰어다니며 놀던 산과 강, 아버지와 어머니 손을 잡고 소풍 갔을 들녘, 어린 소녀였을 엄마가 거닐던 그곳이 궁금했지만, 노쇠한 엄마는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고 에둘러 말했다. 나는 그것이 오래되어 잊힌 것이 아니라, 그리움에 사무친 엄마가 스스로 지워나간 것이라 짐작했다. 엄마는 먼 고향을 그리워할 마음속 작은 여유마저 허락되지 않은 고단한 삶을 살았다.
작고 아담한 체형인 엄마는 젊은 시절 워낙 고생을 많이 한 탓에 늘 아픈 곳이 많았다. 그 시절 어머니들이 대부분 그러셨겠지만, 아이를 여섯이나 낳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하시지 못했다. 허약한 몸으로 버텨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어디가 좀 아파야 그 핑계로 하루라도 쉬는데, 아픈 곳 없이 멀쩡하니 쉴 수도 없었단다. 자식들 건사하느라 초인적인 정신력이 발휘되었을 테지만, 올곧은 엄마는 융통성도 없고 거짓말도 할 줄 몰랐다. 그 덕에 늘 자식들이 태어난 달이 되면 뼈 마디마디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생의 흔적이 쌓이고 쌓여 병이 되었는지 내가 막 직장에 취직할 무렵에는 몇 개월간 병원에 입원도 했다. 엄마는 아파 누워 계신데 병원에서는 끝까지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말문이 막혔다. 약 1년 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다행히 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그 이후로 엄마는 더 쇠약해졌다.
무뚝뚝하고 무서운 아빠와 달리 엄마는 항상 나를 따뜻하게 밝혀주는 태양이었고, 언제라도 쉬어갈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었다. 칭찬도, 야단도 하지 않던 아빠에게 딱 한 번 종아리를 맞았더랬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나 1학년쯤 되었다. 감기에 걸린 나는 무슨 연유인지 혼자서 병원에 가게 되었다. 요즘은 아이 혼자 병원에 가면 진료도 받을 수 없지만, 그때는 종종 그랬다. 어린 내가 병원에 곧장 가지 않고 근처 오락실에 들른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에 아빠가 절대 가지 말라고 했던 오락실이었는데, 마치 마법의 주문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병원비로 받은 천 원을 오락하는데 쓸 용기는 없어 다른 아이들이 오락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는데 그만 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나중에 시간을 알아차리고 부랴부랴 병원을 향해 뛰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엄마와 누나들이 아들을 찾아 헤매느라 온 동네에 난리가 났다. 결국, 아빠한테 종아리 수 십 대를 맞았다. 매질로 벌겋게 부은 종아리가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내 옆에서 숨죽이며 울던 엄마 모습도. 엄마는 연고를 발라주는 내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빠도 마음속으로 울었겠지만, 어린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다시는 엄마 눈에서, 나로 인해, 눈물 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엄마 말이라면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었다. 한때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서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했었다. 어머니는 학교까지 찾아와 반대했고 나는 곧 포기했다. 사실 이때를 제외하고는 엄마가 특별히 나에게 뭔가를 하라고 하거나,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 흔한 '공부해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침 7시에 등교해 자정을 넘겨 집에 왔다. 독서실이라도 다니면 새벽 2~3시나 돼야 집에 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엄마는 늘 잠이 부족한 아들을 보며 안쓰러워했다. 학교 가는 날인데 늦잠을 자도 깨우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왜 깨우지 않았느냐며 볼멘소리 했지만,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고양이 세수에 아침밥은 거르고 학교까지 10분 안에 날아가는 건 고스란히 내가 감당해야 했다. 그 시절 엄마는 내가 몸에 좋지 않은 라면을 먹는 걸 아주 싫어하셨는데, 그래도 먹겠다고 고집부리면 꼭 달걀을 넣어 끓여 주었다. 달걀은 엄마가 자식한테 인스턴트 음식을 허락해 주는 최후의 보루였던 셈이다.
아빠 고향은 강원도, 엄마 고향은 경상도라 꽤 먼 거리다. 어떻게 두 분이 만나 결혼했는지 항상 궁금했다. 엄마한테 여쭤봤지만, 옛날이야기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 나이 스물하나, 아빠 나이 열아홉에 만나 결혼했다. 아빠는 엄마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하지만 결혼식 사진도 없고 결혼기념일도 잊어버렸단다. 사연이 있는 듯했지만 거기까지 여쭤보지는 못했다. 한 번은 엄마 젊었을 때 사진을 봤는데 큰누나랑 정말 똑같았다. 사실은 큰 누나가 엄마를 꼭 빼닮은 것이겠지만, 사진 속 젊은 엄마는 큰누나처럼 엄청 예뻤다. (당시에 내게 가장 예쁜 사람은 큰누나였다) 아빠도 이 모습에 반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두 분의 관계는 언제나 엄마의 아빠를 향한 일방적인 사랑이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아빠 눈은 다른 곳을 향했고, 엄마 눈은 언제나 아빠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집안일도 많이 하고 엄마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아빠지만, 소싯적에는 정말 엄마 속을 무던히도 썩였다. 아빠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눈물로 지새운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엄마는 아빠를 바라보고, 아빠만을 사랑하며 살고 있다. 엄마 가슴에는 부처님이 백 분쯤 앉아 계신 게 틀림없다.
엄마의 삶에서 할머니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라고 끔찍이도 나를 예뻐해 준 할머니지만, 엄마의 역사에는 악역으로 등장하신다. 엄마는 정말 평생 호된 시집살이를 겪었다. 살아생전 할머니는 여장부셨는데 엄마한테는 호랑이처럼 엄격하고 무서운 시어머니였다. 평생 화라고는 전혀 내지 않는 엄마도 시집살이 이야기를 할 때면 머리부터 절레절레 흔드셨다. 눈물도 잘 흘린다.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남편 하나만 믿고 사는 시집살이 서러움이 어땠을지 아들인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오랫동안 지병으로 앓아누운 시아버지를 돌보고, 어린 시동생들까지 챙겨야 하는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어찌 다 말로 풀어낼 수 있을까? 게다가 누나 둘을 낳고 아빠는 군대에 갔다. 엄마 시집살이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은 나올 거라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 인고의 세월은 결코 쉬이 흐르지 않았다. 그때 엄마는 당신께서는 절대 며느리한테 시집살이를 겪게 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요즘도 그걸 지키려고 무척 노력한다. 아내와 결혼한 지 17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아들 집에 다녀간 건 딱 세 번뿐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들 목소리가 듣고 싶어도 결코 먼저 전화하지 않는다. 며느리 스트레스받을까 염려해서다. 아내에게 시집살이 스트레스가 왜 없겠느냐마는, 이런 시어머니 속마음을 현명한 아내도 가슴으로 느끼리라 믿는다.
떨어져 살기에 매일 엄마께 전화드린다. 함께 살지 못하는 죄책감 때문이다. 다행히 누나들이 가깝게 살고 매일 집에 들러 부모님과 동전 치기 화투도 치고, 모시고 나가 외식도 자주 하니 안심이 된다. 누나들한테 고마울 따름이다. 평생 소박한 삶이 몸에 익은 분들이라 외식이라고 해봤자 짬뽕이나 막국수 한 그릇이 전부다. 자식들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걸 싫어하신다. 용돈도 많이 드리지 못하지만, 그나마도 모아 두었다가 결국에는 손주들한테 다 쓴다. 아낌없이 주고도 더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인가 보다.
지난해 엄마는 팔순이 되셨다. 내 눈에 엄마는 젊은 엄마 모습 그대로인데, 엄마는 이제 많이 늙었다고 한다. 팔순 잔치는 따로 안 하고 가족들끼리 큰누나네 시골집에 모여 조촐하게 식사를 했다. 한 10년 전쯤부터 내가 제안해 1년에 한 번 가족 여행을 했다. 부모님과 어린 시절 이야기도 나누고 손주들에게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몇 번 하다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다들 살기 바빠서 모이는 게 쉽지 않았다. 중요한 가족행사인 만큼 엄마 팔순 생일에는 손주들까지 모두 참석하기로 했다. 생신 전에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 연락도 안 드리고 찾아뵈었다. 엄마가 해주는 슴슴한 된장찌개, 어묵볶음, 오이소박이가 그리웠다. 춘천 사람이라 평생 먹었는데도 여전히 질리지 않는 막국수도 먹었다.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춘천집을 나서는데 엄마가 다음에 내려올 때 좋은 카메라 있으면 꼭 챙겨 오라고 당부했다. 가족 모임에 종종 카메라를 챙겨갔지만, 엄마가 사진 찍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이유를 여쭤보았다. 엄마 대답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엄마에게는 지금이 가장 젊고 예쁜 순간이니 이번 팔순 때 영정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다. 백세시대인데 벌써 그런 걸 준비하냐고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간이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엄마는 아직 젊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언제부턴가 춘천집에 내려가면 엄마는 나보다 아이들을 더 반갑게 맞이한다. 다행히 아이들도 춘천에 가면 아내가 말하는 '춘천 모드'로 바뀌어 평소에 안 먹는 것도 잘 먹고 잘 놀고 아무데서나 잘 잔다. 특히 둘째 아이는 할머니 김치(집에서는 안 먹는), 할머니 전, 할머니 두부조림에 밥 두 공기는 기본이다. 매운 음식은 입에도 안 대면서 매콤한 할머니 두부조림은 양념에 쓱쓱 비벼가며 맛나게 먹는다. 할머니가 한번 안고 뽀뽀하자면 기꺼이 그 품으로 달려간다. 좀 컸다고 첫째 아이는 할머니 사랑 표현에 부담을 느끼는데, 둘째는 할머니 마음을 스르륵 녹인다. 춘천에 가면 둘째가 단연 효자다. 둘째를 낳고 처음 춘천집에 갔을 때, 낯을 심하게 가리는 아이가 부모님 얼굴을 보자마자 울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몹시 걱정했었다. 숨 막히는 순간, 그토록 생글생글 웃던 둘째는 그전까지 나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천사 미소를 선물했다. 어디를 가든 낯선 사람만 보면 울어대던 둘째가 처음 보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백만 불짜리 미소를 보여주던 날, 우리 몸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얼마 전까지 1년에 한두 차례씩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갔다. 엄마는 나무와 들꽃을 좋아하고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은 자식, 손주들과 함께 여행도 하니 기꺼이 함께 하셨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오시면 이삼일은 앓아누우셨다. 이제 연세가 있으셔서 차 타고 여행하는 것도 힘들어하셨다. 물론 한동안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전화를 드려도 안 아픈 척 더 맑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니 알 도리가 없었다. 이제 함께 여행 가자는 말씀드리기도 죄송스럽다. 둘째가 태어난 해, 부모님과 둘째 누나, 조카들 그리고 나와 첫째가 함께 제주 여행을 했다. 엄마는 유독 유채꽃밭에서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그 미소가 얼마나 싱그러운지 본 적도 없는 엄마의 젊은 시절이 연상되었다. 그날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예뻤다. 내년 봄에 엄마를 모시고 다시 한번 제주에 가고 싶다. 유채꽃밭에서 소녀처럼 웃는 엄마의 예쁜 모습을 꼭 다시 보고 싶다. 엄마는 늘 예뻤지만, 오늘 엄마가 가장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