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골적이고 적나라한 <브런치 라디오> 도전기
어머니의 여든한 번째 생신을 맞아 온 가족이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각자의 삶에 스며있는 엄마, (외) 할머니의 흔적을 글쓰기라는, 이제는 모두에게 낯설어진 방식으로 쫓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부끄럽고 민망해서 차마 말로 전하지 못하는 몽글몽글한 감정의 질감을 왠지 글로는 잘 담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단지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글을 모아 책을 만들고, 어머니 생신 때 각자 쓴 글을 어머니 앞에서 깜짝 발표(낭독)하면 얼마나 특별하고 감동적일까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신이시여, 정녕 이런 멋진 아이디어가 저에게서 나온 건가요?
조카 열한 명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특별 이벤트에 대한 취지와 방법을 설명하고 한 달여 기간을 정해 글을 쓰도록 했습니다. 각자의 엄마(저한테는 누나)에게 전달하고 글을 받아내는 임무까지 부여했습니다. 형식에는 제한이 없지만 분량은 가능하면 A4 한 장 이상은 채워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습니다. 책 한 권 원고 분량을 채우기 위해 각자가 책임져야 할 최소한의 몫이었습니다. 조카들에게 보낸 메일 일부를 그대로 소개해 봅니다.
안녕하세요, 외삼촌입니다.
이렇게 뜬금없이 조카들에게 메일을 보내는 이유는 "가족도서 제작 프로젝트 나의 어머니(할머니)"를 진행하기 위함입니다. 많이 당황스럽죠? 그럼 제가 간단히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취지와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존재는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입니다. (조카들에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겠죠) 예전에 우리 형제들은 한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고, 함께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성장해서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우리는 또 그렇게 다른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원래의 출발점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현재의 우리가, 우리로 있을 수 있게 된 그 '근본'말입니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할머니)"란 소재로 가족도서를 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이 필요한데, 그 글은 바로 우리(자식과 손자들)가 써 내려가야 합니다. 각자가 엄마, 할머니와의 추억을 글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할머니와의 에피소드 (음식, 여행, 명절, 외식, 또는 일상 등)를 눈을 감고 생각해 보세요. 작가처럼 잘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나만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풀어내면 됩니다.
메일을 보내자 다양한 반응을 쏟아냈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글을 쓰냐?'며 나이로 누르는 누나가 있는가 하면, 너무 좋은 취지라며 적극 참여를 약속한 누나도 있었습니다. 무관심으로 일관한 누나도 있었습니다. 조카들은 재미있겠다며 동참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 아무도 글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가족 단체방에 분노의 이모티콘을 마구 올렸습니다. 모두 핑곗거리를 한 뭉텅이씩 쏟아냈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습니다. '글 쓰기가 어렵다'였습니다.



난감했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습니다. 누나들은 오랫동안 글 쓸 일이 없었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조카들은 한창 이런저런 이유로 글 쓸 일이 많을 텐데....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명문장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추억의 편린을 소박하게 글로 표현하는 건데 그렇게 어려운가? 나 혼자 꿈을 꾸었던 걸까?
마침 그날 저녁 여덟째 조카에게서 첫 번째 답장이 왔습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조카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글을 다 읽고 한참이나 컴퓨터 앞에 우두커니 앉아있었습니다. 글 전체가 아름답고 따뜻했지만, 마지막 부분이 압권이었습니다. 참았던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어머니의 이름'을 소재로 할머니와의 추억에 생명을 불어넣은 조카가 무척이나 대견했습니다. 여기 마지막 구절을 소개해 드립니다.
오랫동안 그녀와 함께했지만, 나는 한동안 그녀의 이름을 몰랐거나 까먹었었다. 오랜 시간 엄마이고 또 할머니였던 그녀의 이름은 장, 순, 희다. 그녀는 장순희다. 장순희의 만두이고, 장순희의 두부조림이며, 장순희의 호박 반지이고 장순희의 가족들이다. 그녀의 이름 석 자야말로, 어린아이였고, 소녀였으며 일찍 엄마가 되었고, 할머니가 된 그녀의 전 생애를 포괄할 수 있는 공평한 이름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가족과 그녀 자신이 그 이름을 더 기억하고 불러주었으면 한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할머니, 그녀의 이름은 장순희입니다.
여덟째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칭찬도 칭찬이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조카가 쓴 글을 다른 가족에게 읽어보게 해도 될지 물어보았습니다. 다행히 쿨하게 그러자고 하더군요. 글쓰기 어렵다는 가족들에게 여덟째 조카의 글은 좋은 본보기가 되리라 확신했습니다. 그 글을 접한 다른 가족들도 저와 비슷한 감동을 느꼈음에 틀림없습니다. 일주일 후 모두의 글이 도착했으니까요. 분명히 여덟째 조카의 글이 다른 가족의 잠들어 있는 문장력을 흔들어 깨워주었을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글은 모았지만 아직 책으로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아직 어머니는 자식, 손자들이 당신을 향한 마음을 글로 표현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계십니다. 코로나 때문입니다.
코로나는 우리 가족이 만나는 걸 방해했습니다. 우리 가족에게만 그런 건 아니겠습니다만, 유독 가혹했다고 말할만했습니다. 워낙 대가족이었고 각지에 흩어져 살았으니까요.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을 무척이나 잘 준수했습니다. 어머니께 혼자만이라도 찾아뵈면 안 되는지 여쭤보았더니 손자들 건강이 먼저라며 집에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늘 그렇듯이 어머니께는 당신보다 가족이 먼저니까요. 그런 이유로 어머니 생신 때도, 추석 연휴 때도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지 못했습니다. 깜짝 이벤트를 선보일 기회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 이벤트는 아직 유효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 창피함을 무릅쓰고 손수 만든 브런치 북 <어머니의 식탁>을 '가장 좋아하는 브런치 북'에 스스로 추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브런치 라디오>를 통해서 DJ의 낭랑한 목소리로 어머니의 이야기, 어머니와의 추억이 소개된다면 코로나가 앗아간 깜짝 이벤트를 어머니와 우리 가족한테 돌려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손자부터 환갑이 된 큰딸까지 각자의 기억에서 소환한 어머니이며 할머니이며 또 당신의 삶 자체인 장. 순. 희 이름 석자가 불려진다면 그보다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일이 있을까요? 그리고 감동 가득한 이야기, 배를 잡고 실컷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어머니의 식탁>을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를 통해 코로나 시대에 가족이 정(情)을 나누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 보고 싶습니다.
인디자인을 배워 모은 글을 직접 편집해 책으로 완성하려고 했습니다. 인쇄소를 운영하시는 지인이 '인디자인 금방 배워요' 하는 말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서점에 달려가 관련 책부터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인디자인은 책만 보고 혼자 공부한다고 될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프로그램(예를 들어 한글)으로 편집할까도 고민해 보았지만 그럴 경우 진짜 책의 느낌이 나지 않을까 걱정되었습니다. 전문적으로 일을 하는 편집자에게 견적을 의뢰했더니 가격이 어마어마했습니다. 판매용도 아니고 가족들, 가까운 친지분들께만 선물할 예정이라 그렇게 큰 비용을 감당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8회 브런치 북 출판 프로젝트'에까지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기대는 하지 않고 있지만, 선정된다면 어머니와 우리 가족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듯합니다.
책으로 만드는 과정이 다소 늦어진 김에 처음 계획을 약간 수정해 볼까 고민 중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 분이 글쓰기에 빠져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글이 들어간다면 아마 단편집이 아니라 장편소설 분량의 책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뚝뚝하고 말씀이 별로 없으신 아버지가 과연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쓰실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심각해진 코로나로 매년 함께 하던 가족 송년회도 올해는 어려울 듯합니다.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할지 머리가 지끈지끈합니다. <브런치 라디오>에 소개되거나 '브런치 북 출판 프로젝트'에 선정된다면 아버지를 설득하기 쉬워질까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제 아내는 글쓰기 대신 그림으로 이번 이벤트에 참여했습니다. 사실 매형들과 며느리는 강제 참여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자발적 참여를 유도했다고나 할까요? 그림에 소질이 있는 아내는 책 표지를 그려보겠다고 했습니다. 집안 사정을 꿰뚫고 있는 아내는 명절 때나 생신 때 (심지어 어머니 생신 때도) 자식들이 배불리 먹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머니의 식탁>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14개의 의자가 놓여야 하지만 항상 13개의 의자밖에 놓이지 않는, 어머니 자리가 없는 어머니의 식탁을 표현했습니다. 책 제목을 <어머니의 식탁>으로 선정한 이유도 아내의 그림 덕분입니다. 마감 일정에 맞추느라 급하게 마무리했는데 여러 가지 변수로 뜻밖의 시간이 생겨 아내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우리 가족, 이 정도면 준비되지 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