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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Dec 15. 2020

오래된 기억 속 한 남자

고전의 재味발견 :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와! 진짜 이런 책이 다 있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이었다. 어떻게 이토록 철저하게 세상(사회)과 등 지고 비루하게 살 수 있을까? 무엇이 그를 인간세상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타인 앞에서 거짓 웃음(익살)으로 일관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를 그토록 부끄럼 많은 생애로 이끌었을까? 세상 전부와 자신을 스스로 왕따 시킨 한 인간의 이야기가 <인간실격>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독서로 마음이 이렇게나 불편해보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을 놓지 못했던 건 끝없이 추락하는 한 인간의 삶이 도달하는 종착역이 어디인지 궁금해서였다. 타인(작품 속 주인공)의 불행에서 느끼는 일종의 안도감(나는 아니라서 다행이네)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그런데 나는 왜 완독 후에도 한동안 이 작품에 대해서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을까?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을 석 장 본 적이 있다."

 <인간실격>의 위대한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석 장의 사진 속에 나타난 주인공 얼굴에는 그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다. 나(화자)는 그 사진 속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그의 삶을 따라가 본다. 그리고 소설은 그가 우연한 경로로 입수한 세 편의 수기를 통해 주인공의 삶을 세 차례 나누어 보여준다. 그 삶은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실제 삶과도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주인공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유년기를 보낸다. 그런 그가 왜 가족(특히 아버지)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등지게 되었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왠지 그는 세상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음지에 머물며 특유의 익살로 처세하는 편을 택한다. 당당하게 맞서 살아낼 용기가 없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한 것이리라. 집을 떠나 유학생활을 시작한 청소년기는 술, 담배, 그리고 여자와 좌익 사상에 함몰되는 시기다. 유부녀와 동반 자살을 시도하다 혼자만 살아남는가 하면, 자신의 익살을 눈치챈 호리키와 평생의 악연을 맺기도 한다. 남다른 외모와 고독함에서 비롯된 오묘한 매력으로 숱한 여성의 사랑을 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무명 만화가의 삶을 살아내던 청년기는 약물중독과 각혈로 결국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시기다. 비루하고 비참한 삶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한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스스로 인간 실격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인간실격>을 읽는 내내 주인공이 느낀 죄의식에 공감하지 못했다. 무엇이 그를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해 익살이라는 고치실로 온몸을 칭칭 감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등 돌리게 했는가? 다만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발견할 뿐이었다.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익살이라는 가면으로 꾸밀 수는 있어도 인간을 속일 수 없는 마음,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의 세계에 발을 내디딜 자신이 없어 결국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게 아닐까? 그러나 그도 순진한 피해자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끝없이 세상 밖으로 내몰리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자살 충동 역시 그런 욕망의 일부였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또 범인 의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이 인간 세상에서 평생 동안 범인 의식으로 괴로워하겠지만 그것은 조강지처 같은 나의 좋은 반려자니까 그 녀석 하고 둘이 쓸쓸하게 노니는 것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주인공은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늙은 보모와 함께 살아간다. 그 모습이 어찌나 웃프던지. 모든 것을 잃은 그가 남긴 마지막 말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한)은 이 작품 전반에 흐르는 허무주의(니힐리즘)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작품 속 주인공과 다르게 다자이 오사무에게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진리는 통하지 않았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스스로 삶을 멈추었다. 다섯 번째 자살 시도에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패전 후 일본 문학계에서 '사양(斜陽)'으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가 <인간실격>을 마지막 작품으로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작품이 연재될 당시 일본 독자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읽어나갔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적중했다. 


 죽음의 아우라를 가진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20대 중반, 술 한 잔 마시고 늦은 밤거리를 걷던 내게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인생이 행복하신가 봐요?" 대학 졸업반이었던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로 나름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던 터였다. 그런 나에게 참으로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게다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할 질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집(당시 고시원)에 가는 방향이 같아 어쩔 수 없이 두 시간을 그와 나란히 걸었다. 그는 내게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이렇게나 불행해질 수 있구나를 알게 되었다. 걷는 내내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도무지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내 고민은 그 남자에 비하면 깃털처럼 너무 가벼워 금방이라도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슬픈 얼굴을 가진 사람이 처음 보는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 그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는 죽음과 같은 뉘앙스가 깊게 퍼져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종류의 말이었다. 그에게 인생이 얼마나 살만한지를 역설하기엔 나는 삶에 대해 서툴렀다. 하지만 끈질기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그 앞에 들이댔다. 그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서 짧은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그래도 걱정이 된 나는 공중전화로 달려가 경찰에 신고부터 했다. 그런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 남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두서없이 설명해 주었는데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에서도 난감함이 느껴졌다. 결국 끈질긴 요청으로 경찰은 그 남자와 헤어졌던 지역으로 순찰차를 보내겠다고 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왜 <인간실격>을 읽으면서 20년도 더 된 그 남자가 갑자기 떠오르게 된 걸까? 


 다자이 오사무는 나와 생일이 같았다.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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