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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Feb 28. 2021

고독한 인간 vs. 유희의 인간

고전의 재味발견 : 불멸 (밀란 쿤데라)

 고전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고전의 재味발견>을 벌써 몇 달째 손도 못 대고 있다. <불멸>, <설국>, <수레바퀴 아래서> 이렇게 세 권이 밀렸다. 가장 오래 밀려 있던 <불멸> 숙제를 끝내야 나머지도 할 수 있을 듯한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정작 독후활동을 하려니 눈앞이 막막했다. 소설적 재미와는 별개로 난해한 작품 전개 방식 때문에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마냥 미뤄둘 수만은 없어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무어라도 써야겠다 끄적거렸다. 잠이 덜 깼는지 횡설수설하며 썼다. 쓰려고 작정하니 써지더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으로 ‘불멸’을 검색해 보니 아래와 같이 두 가지 뜻으로 풀이되었다.      


 불멸 1 :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아니함

 불멸 2 : 석가모니가 죽은 일


 물론 한자가 다르다. 첫 번째는 不滅이고, 두 번째는 佛滅이다. 하지만 우연치고는 너무 기발하다. 하나의 단어에 이렇게 극도로 대립하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으니 말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저명한 시인이자 소설가인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으로부터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소설가’라고 격찬받은 밀란 쿤데라의 <불멸>은 不滅에 관한 소설이다. 그렇다고 SF 장르에서나 나올법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괴테의 입을 빌어 작가가 말하려는 불멸은 ‘사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자들의 세속적인 불멸’이다. 

 불멸의 화신, 불멸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로 훗날 괴테의 젊은 여인으로 역사 속에 기록된 베티나가 등장한다. 그녀는 괴테 주위를 맴돌며 그의 명성을 통해 불멸을 얻고자 한다. 이런 사실을 눈치챈 괴테는 베티나를 받아들일 수도 내칠 수도 없다. 그녀와 반대 입장, 즉 죽어서도 후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혐오하는 인물로 헤밍웨이가 등장한다. 그는 완벽하게 잊힐 권리를 원한다. 작품 속에서 베티나와 헤밍웨이가 마주쳐 인사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형식이 꽤 복잡하다는 의미이다. 주의 깊게 따라가지 않으면 금방 길을 잃게 된다. 마치 미로처럼 말이다. 괴테와 베티나의 이야기는 사실(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에 근거한 소설 속 사건으로 표현된다. 헤밍웨이는 사후 세계에서 괴테와 만난다. 사후 세계 선배인 괴테가 까마득한 후배 헤밍웨이를 안내하며 불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소설 속) 현실에서는 아녜스로라라는 자매가 등장한다. 아녜스는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불멸의 반대 길을 걷는다. 아녜스는 이 세상에서 물망초 가지를 하나 들고 밖으로 나서는 그녀를 상상한다. 세상이 오직 물망초로만 그녀를 기억하길 원하며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지길 바란다. 아무도 (심지어 가족조차) 그녀를 위해 울어주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의 동생 로라는 작더라도 불멸의 길을 걷고 싶다. 주위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추억되기를 원한다.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자신이 겪는 불행한 순간을 초극하여, 자신을 알았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기 위해 자꾸  ‘무언가’를 시도한다. 


 이 작품은 매우 기발하게도 밀란 쿤데라 자신도 등장한다. 소설 속 인물인 아베나리우스 교수와 만나 사우나도 즐기고 술도 마신다. 그리고 작품(불멸)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아래와 같은 대화를 통해 작가 자신을 풍자하는 부분이다.      


 “지금 자네가 쓰는 게 정확히 어떤 건가?”

 “소설 속의 소설이요, 내가 써 본 것 중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될 거야. 자네 역시 그 이야기를 읽고 슬퍼할 걸세.”

 “그 소설의 제목은 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그 제목은 이미 써먹지 않았는가.”

 “그래. 써먹었지! 하지만 그때 난 제목을 잘못 달았어. 그 제목은 지금 쓰는 소설에 붙여야 했어.”     


 거장만이 할 수 있는 농담인 건가? 그의 위대한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제목을 잘못 달았다니! 그 작품에 이 제목 말고 다른 제목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토록 난해 한대!) 이 부분을 읽을 때 물이나 커피를 마시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정말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불멸>은 정말 복잡하다. 기-승-전-결의 일반적인 구성이 아니다. 에피소드로 구성된 소설은 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또한 모두 연결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이 일정하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 과거와 현재도 들쑥날쑥하다. 베토벤과 나폴레옹 (이들은 모두 괴테와 만난다)이 등장하며, 뜬금없이 루벤스(우리가 아는 그 화가 루벤스인지 모르겠다)가 등장하며, 고속도로에 몸을 웅크린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는 세상과 단절되어 그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도망치기 위해 외곽도로 한가운데 몸을 웅크린다. 차량 몇 대가 그녀를 피하다 사고가 나고, 이 사고는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주인공 중 한 명이 차에 타고 있다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나중에야 밝혀진다. 
(휴~ 정말 따라가기 힘든 작품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흥미롭다. 진심!)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책을 읽을 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배운 세대라 그런지 항상 이 부분을 고민하게 된다. 독서만큼은 진심인 편입니다. 솔직히 이 작품은 한 번 읽어서는 그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530페이지 넘는 분량이라 완독 하는데 다소 시간도 필요했다. 흥미로운 작품이라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복잡한 구성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작품 속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베티나와 아녜스라는 두 여성의 흔적을 따라감으로써 마지막에 남는 단어는 ‘고독’이다. 불멸을 추구하지만 살아서도 죽어서도 인간은 고독한 존재다.       


 그렇다면 단절된 이 세상에서 고독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밀란 쿤데라는 아베나리우스 교수와의 대화 중에 그 해답을 제시한다. 아예 그 세계를 통째로 유희의 대상으로, 하나의 장난감으로 삼아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베나리우스 교수는 밤마다 가슴에 칼을 하나 품고 외출한다.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 바퀴에 펑크내기 위함이다. 그것이 아베나리우스 교수가 세계를 통째로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법이고, 너무 진지한 밀란 쿤데라에게 동참을 권하기도 한다. 강간범으로 몰릴지언정 그는 자신의 유희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베나리우스 교수의 유희에 동참할 수 없었던 밀란 쿤데라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불멸>이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오가며, 역사적 인물들을 소환하고 작품 속 등장인물과 대화하며 스스로를 조롱하는 그의 농담이 세상을 통째로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인 것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의 인간이 단절된 이 세상에서 고독을 극복하는 탈출구였던 것이다. 밀란 쿤데라에게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밀란 쿤데라의 텍스트는 늘 훌륭한 교재다. <불멸>에서 기록해 놓은 문장들을 펼쳐놓아 본다. (번역의 중요성도 새삼 강조하고 싶기도 하고...)


피로라는 것, 그것은 사람을 삶의 기슭에서 죽음의 기슭으로 나르는 침묵의 다리다.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물론 행복 (혹은 사랑, 정의 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당신이 당신의 노력을 투쟁이라는 말로 지칭하고 싶다면, 그것은 곧 당신의 소중한 노력 속에 누군가를 땅바닥에 처박아 버리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음을 함축한다.


큰 불멸을 갈망하는 베티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온갖 근심과 더불어 사라지기를 거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초극하여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우리 몰래, 그리고 대개는 우리 육체를 거스르면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우리가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는 순간부터 감정은 더는 감정이 아니라 모방이요 감정의 과시다. 그것을 사람들은 흔히 히스테리라고 부른다. 그래서 호모 센티멘탈리스 (다시 말해서 감정을 가치로 정립한 사람)는 사실 호모 히스테리쿠스와 같다.


“요즘 사람들은 글로 쓰는 건 무엇이건 모조리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혹은 만화로 개작하려고 하네. 그러나 소설에서 본질적인 건 오직 소설로만 말할 수  있기에, 어떤 형태로 개작하건 각색을 하면 비본질적인 것만 남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설을 쓸 만큼 미친 작가라면, 그리고 자기 소설을 보호하고 싶다면, 그는 사람들이 각색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달리 말해 이야기할 수 없는 방식으로 소설을 써야 한다네.”


산다는 것, 거기에는 어떤 행복도 없다. 산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자아를 나르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존재, 존재한다는 것은 행복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샘으로, 온 우주가 따뜻한 비처럼 내려와 들어가는 돌 수반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이 말은 옛날에는 남성상에 따라 만들어진 이 세계가 이제 곧 여성상을 본보기로 삼으리란 걸 의미합니다. 세상은 더 기계적이고 금속성일수록, 더 기술적이고 차가워질수록 열기를 필요로 하며, 이 열기는 오직 여성만이 제공할 수 있소.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여성상을 본보기로 삼아야 하고 여성의 안내에 우리를 맡겨야 하며 ‘Ewigweibliche’, 즉 영원한 여성이 우리에게 깃들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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