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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Apr 15. 2021

돔박꼿이 활짝 피엇수다

내궁내정 (역사적사건으로서 4·3과 순이 삼촌)

 지난 4월 3일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제73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렸다. 故 노무현 대통령께서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 공식 사과한 이래로 문재인 대통령도 2018년, 2020년에 이어 올해까지 모두 세 번 추념식에 참석해 부당한 국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분들과 그 유족에게 위로를 전했다. 특히 '돔박꼿이 활짝 피엇수다(동백꽃이 활짝 피었습니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추념식에 처음으로 국방부 장관과 경찰청장이 함께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군경 최고 책임자가 정부에서 주관하는 4·3 공식 추념식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화해와 상생'에 닿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난하다. 그래도 이렇게 한 걸음 더 내디뎠으니 완전한 용서를 구할 날도 언젠가 오지 않을까? (물론 용서는 사과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에게서 나와야 한다)

<제주 4·3 평화공원 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이번 추념식에서 문대통령은 4·3 특별법 개정에 대한 내용을 전했다. 이번 법 개정을 통해 1948~9년 당시 군법회의로 억울하게 수형인이 됐던 2530명이 일괄 재심으로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열렸다. 정부의 추가 진상조사와 함께 수형인 명예회복, 배상과 보상에 있어서도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준이 마련된 셈이다. 아울러 유해 발굴 사업과 함께 유전자 감식을 지원해 고인을 가족들 품으로 돌려보내 줄 것, 4·3 트라우마센터를 국립 트라우마센터로 승격해 제주 도민의 아픔이 온전히 치유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마침내 제주도에 완전한 봄이 올 때까지 우리 모두 서로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자"는 대통령의 바람이 부디 이루어지기를, 제주의 아픔을 먼발치에서 지켜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함께 소망해 본다. 


 그런데 제주 4·3 사건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4·3 사건에 대해 제주 한달살이를 계기로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제주에 머무를 때 4·3 평화공원에 들러 생생하게 경험했던 자료들과 홈페이지에 정리된 자료를 통해 역사적 사건으로서 4·3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희생자들은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식이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가 2003년 발행한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라고 설명한다.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 약 2만 5천 ~ 3만 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제주 인구 1/9에 해당한다. 희생자의 33%가 어린이, 여성, 노약자라는 점은 이 사건이 이념 대립을 넘어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했던 부당한 국가 폭력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드러낸다. 희생자의 86%가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진압과정에서 군인 180명, 경찰 140명도 전사했다. 국가라는 이름 아래 목숨을 내놓은 그들 역시 '국민'이었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다. 제주읍에서 3·1절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때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치는 일이 발생한다. 기마경찰이 다친 아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이를 지켜보던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그러자 관덕정 부근에 포진해 있던 무장경찰이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경찰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되었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제주사회가 들끓었다. 4·3 사건의 도화선이라 불리는 ‘3·1 사건’의 시작이었다.


 경찰 발포로 제주도민 6명이 사망한 3·1 사건에 항의해 1947년 3월 10일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유례없던 민·관 총파업에 미군정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한다. 뭍에서 지원경찰이 대거 파견됐고,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들이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을 장악한다. 그들은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이는 4·3 사건 발발의 직접적인 요인이 된다. 당시 한반도는 분단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반된 민심과 5·10 단독선거 반대 투쟁을 결합해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습격했다.


 전국에서 5·10 선거를 반대하는 유혈사태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5·10 총선거를 앞두고 제주에서는 미군정과 무장대와의 평화협상(4월 28일)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소위 ‘오라리 사건’이 벌어진다. 평화 협상이 깨졌다. 미군정은 방화사건 이후 무력에 의한 강경진압작전으로 선회한다. 무장대는 5·10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도민을 산으로 이주시키고, 미군정은 이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방해하는 불순세력으로 규정하고 미군 대령을 제주도 총사령관으로 파견해 검거작전을 감행한다. 제주도에 대한 강경 토벌작전이 실시되어 도민들이 집단 희생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다.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증파하여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치고, 대대적인 강경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게 된다.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대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됐다. 본격적으로 군경토벌대가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 살생하기 시작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중산간 지대뿐만 아니라 소개령에 의해 해안마을로 내려간 주민들까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렇게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학살은 군경토벌대만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무장대 역시 해안마을을 습격해 경찰가족과 우익인사를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도 희생되었다. 복수와 증오심. 민간인 희생이 극에 달했다. 1949년 3월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선무공작이 전개된다.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1만여 명 도민들이 하산했다. 그러나 1,600여 명이 총살당하거나 전국 각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1949년 5월 10일에야 재선거가 치러졌고, 그해 6월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자와 전국의 형무소 재소자들이 또다시 희생되었다.(북측에 협력할까 봐) 수난의 세월을 보낸 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 사건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 5,000~3만 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가운데 7년 7개월 만에 마침내 막을 내렸다. 




 현기영 작가님의 소설 <순이 삼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천읍 북촌마을에서 발생한 비극이 순이 삼촌의 배경이다. 이틀 동안 무려 마을 주민 4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제주도 어디가 4·3을 비껴갈 수 있었을까 만은 이렇게 짧은 기간에 마을 주민이 집단 학살당한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당시 해안마을은 초토화 대상 지역이 아님에도 토벌대 군인 2명이 무장대에 살해되자 마을 주민에게 책임을 묻고 집단 학살했다. 북촌 초등학교에 마을 주민 1,000여 명을 집결시키고 군경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을 구분해 300명은 옹팡밭과 당팟 등에서 총살하고, 100명은 다음날 함덕 본부에서 학살했다. 주민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사람들이 불과 이틀 만에 희생당했다. <순이 삼촌>이 1978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현작가님은 모처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순이 삼촌> 역시 금서에 지정되었다. 4·3을 숨기고 왜곡하려는 독재정권의 노력은 30여 년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순이 삼촌은 소설의 형식을 빌린 것일 뿐 사실 그대로를 옮겨왔다. 그래서 아래 문장을 읽을 때는 숨이 막혔다.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비극이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에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4·3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그 시간(자정)이면 이 집 저 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 집 저 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중략)
 아, 한날한시에 이 집 저 집에서 터져 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위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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