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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Apr 17. 2021

왜 아주 짧은 소설을 쓰는가?

책의 미래를 생각합니다. 왜? 좋아합니다, 책을.

 한뼘소설을 시작한 후 모두 열아홉 편을 브런치에 올렸다. 첫 작품은 '순교자'였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왜 지금 나타났는지를 인간 관점이 아닌 바이러스 시점에서 상상해 쓴 글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인간)에게 치명적인 적이지만, 최초의 존재는 그들 사이에서 메시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메시아'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었지만 너무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 '순교자'라고 바꾸었다. 종교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리 큰 차이도 없는데 어떤 제목으로 할지 한참이나 고민했다(일종의 자기 검열도 있었다). 최재천 교수님이 어떤 독서 강연에서 한 말이 한 몫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글의 내용만큼 제목을 지을 때도 고민을 많이 하라는 것이었다. 당연했다. 선택지가 많은 브런치 글을 고를 때도 제목만 보고 결정하지 않던가! 글 쓸 때는 한 문장을 몇 번이나 읽고 고쳐 쓰지만, 제목은 몇 초만에 짓는 내게 딱 필요한 조언이었다. (의미로 볼 때 순교자보다 메시아에 가깝다. 적어도 쓴 사람의 의도는…)


 그리고 '순교자'와 함께 한뼘소설을 쓰게 된 이유를 잠깐 소개했더랬다. 일부 수정했지만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SNS에 최적화된 짧은 소설을 써봐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용기와 위로를 건네는 글은 쓸 역량이 안되고, 책이 점점 우리 사회와 멀어지는 현실이 우려되어 대안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예전처럼 책과 친해지기 어렵다면 적당한 중간 지대를 만들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MZ 세대의 잇템인 인스타그램을 매개체로 활용해서요장르명을 '한뼘소설'이라고 붙여봤습니다. 제가 만든 말은 아닙니다만 제 의도에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1,000 ~ 1,500자 분량의 짧은 글을 '스마트 소설'이라 부르는데 그보다 훨씬 짧은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내가 뭐라고 '책이 점점 우리 사회와 멀어지는 현실'을 우려해 대안을 제시한다고 했을까? 그냥 좀 서글펐다.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책을 보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이…. 남들이 다 휴대폰만 바라보고 있으니 책을 꺼내기가 좀 민망할 때도 있었고, 그 반대 경우도 있었다. 어떤 경우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이니 그만큼 책을 읽는다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2년마다 한 번씩 진행하는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2019년 우리나라 독서인구는 50.6%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두 명 중 한 명은 책을 읽지 않는 셈이다. 독서 인구 1인당 독서 권수도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올해도 조사가 있는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벌써 걱정이다. (그러니까  내가 왜 걱정을…?)

<통계청 사회조사 2019, 독서 인구 및 1인당 독서 권수>
<통계청 사회조사 2019, 연령대별 독서 인구>

 독서 인구 중 10대 독서 인구율이 가장 높고 1인당 독서 권수도 가장 많다. 주위에 있는 10대를 보면 적극적(자발적)으로 독서하는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토록 책 읽기를 좋아했던 준과 Q도 요즘은 만화책에 손이 먼저 가고, 그나마 한 달간 읽을 책을 미리 정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독서하지 않는다. 물론 Q는 여전히 그림책을 좋아하지만 글밥이 많은 책은 멀리한다. 개인적으로 10대가 높은 독서율을 보인 이유는 외부(부모와 수능)의 압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모님들이 여전히 아이들 독서에 관심이 많은 건 분명하고, 수능도 문학, 비문학을 포함해 독서를 하지 않으면 문제 풀기 어렵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최근 3년 치 수능 국어 문제를 재미 삼아 풀어 보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틀렸다. 특히 올해가 가장 어려웠다.)


 반면 20~30대는 오롯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독서를 한다.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보다 독서를 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 연령대에서 '주류'는 독서하는 사람들이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주류에 편입되기를 소망하는 인간의 기본 욕구가 강력히 존재하며, 이들에게 멀고도 먼 책 읽기(두꺼운 책 한 권)의 대안으로 한뼘소설이라는, 지하철 안에서든 화장실에서든 3분만 투자하면 짧지만 완성된 이야기(소설)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읽는 재미에 물들면 다시 책과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에서. 


 아울러 책의 미래도 고민해 본다. 전자책, 오디오 북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책의 미래는 밝다고 야심 찬 포부를 밝힌 일본의 북 코디네이터 우치누마 신타로의 <책의 역습>에서 저자는 관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책의 개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종이에 인쇄해 두껍게 제본된 책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면 모든 것이 책이 될 수 있다. 심지어 제품 포장지 조차도 말이다. 그럼 그 책의 가격은 얼마로 정해야 할까? 선결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다. 그렇다면 200 ~ 300 페이지에 달하는 책 한 권 '가격'은 어떻게 정할까? 누가 그 책의 가치에 가격을 정했는가? 출판업이라는 산업분야의 관습, 최초에 나온 책의 가격, 물가 등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서 가격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창작자'를 존중하는 사회가 된다면 책의 미래는 밝지 않을까? 내가 가진 판돈을 모두 그곳에 걸고 싶다.  


 짧은 소설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계기가 있다. 헤밍웨이의 여섯 단어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단 여섯 단어로 이야기를 만들었고 울림을 주었다. 여.섯.단.어.로 말이다. 그의 단어는 정확했고, 경제적이며,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실 테지만 그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헤밍웨이가 술집에서 친구와 내기를 했더랬다. 아마도 친구가 헤밍웨이를 도발했나 보다. 친구는 헤밍웨이에게 여섯 단어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헤밍웨이가 그 자리에서 만들어 낸 이야기가 바로 이 글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완벽한 이야기다. 글의 분량(책의 두께)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울림을 주는 글에 길이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문장력 만렙,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이기에 가능한 것일 테지만, 거기에서 책의 미래를 발견했다고나 할까?


 짧지만 울림이 있는 글, 휘발성이 강하더라도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글을 지속적으로, 지치지 않고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많은 작가님들과 함께 해 하나의 문학 장르로 자리 잡아도 좋겠다. '문학의 본령'을 건드린다고 심기가 불편해질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기성 작가가 아니기에 이런 도발적인 상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체 높고 고고해서 친구 없는 외로운 양반보다, 장터에서 백성들과 막걸리 한 사발을 나눠 마시고 어깨춤을 덩실덩실 출 수 있는 남사당패 광대가 행복하지 않을까? 아직은 책에게 안녕을 고할 때가 아니다. 책이 다음 세대에도, 그다음 세대에도 우리의 친구로 곁에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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