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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Apr 23. 2021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시

김남주 시인 '어떤 관료'와 진보에 대하여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 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한때 역사를 공부했던 사학도의 지극인 개인적인 견해로 '만약에 ~ 했다면'이라는 상상력을 발휘해 과거에서 딱 한 가지를 수정할 수 있다면 해방 후 '친일 세력 청산'을 말할 것 같다. 그럼 적어도 현재 우리 사회가 겪는 갈등의 근원을 반쯤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 번은 반드시 겪어야 할 진통을 타의에 의해 잃어버린 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오래전에 작고한 김남주 시인도 '어떤 관료'에서 이런 마음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우리 시사(詩史)에 민중 해방이라는 혁명의 노래를 각인시킨 시인은 관료들의 매판성과 반민족성을 근면, 성실, 정직, 공정 등의 가치에 빗대 날카롭게 풍자했다. 역시 시인은 위대하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난 달랐을까?' 아니라고 용기 있게 대답하지 못하겠다. 밀란 쿤데라의 <향수>에 나온 글귀가 생각났다. "시대는 단지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장 다양한 심리적 욕구들을 충족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을 뿐이다."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결국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말이다. 쿤데라의 문장은 시인만큼 위대하다. 




80년대 학번인 누나가 데모에 참여해서 아빠와 다퉜다. 국민학생인 나는 누나한테 '아빠가 경찰인데 어떻게 데모를 하냐'며 누나를 나무랐다. 어린 내게 두 가치는 양립할 수 없었다. 누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90년대 학번인 나도 데모에 참여했다. 아버지가 경찰이라 맨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중간쯤 어디에서 힘차게 구호를 외치고 팔뚝질을 했다. 차마 화염병은 던질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일찍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나 보다. 적당히 정의롭고, 적당히 비겁한…. 나는 참 적당했다. 




사회는 발전한다. 진보는 역사의 필연이다(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상향 그래프가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도 역사의 퇴보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진보는 경계 밖에 있는 자들을 껴안음으로 완성된다고 믿는다. 역사가 지나온 과정이 증명해 주지 않는가. 일부 정치가가 진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때도 있었다. 적어도 이제는 아니다. 지금 세상은 시민이, 광장이 만들었다. 그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소외된 자도, 낙오된 자도 없이 함께 가야 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는 순간 추락한다. 깨어 있지 않으면 애써 얻은 한쪽 날개를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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