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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Apr 14. 2021

집에서 아보카도 키우기

그리고 불편한 진실 '피의 아보카도'

 브런치에 <아보카도 싹 틔우기>라는 제목으로 글 쓴 지 벌써 1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간이 후다닥 지나가버렸네 하는 아쉬움도 담겨있었지만, 이렇게 작은 아보카도 나무 나이가 벌써 1년을 훌쩍 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난 3월 중순 경, 날씨가 제법 따뜻해져 아보카도 두 그루를 분갈이해 주었다. 잘 자라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생장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싹 틔운 후 옮겨 심은 화분이 너무 작았던 탓인지 건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초등학교 학생한테 유아용 우주복을 입힌 것 같았다. 게다가 훨씬 잘 자라던 아보카도는 주 성장 줄기가 잘린 상태였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더니 생장을 멈춘 이유가 따로 있었다. 마른 잎사귀들을 정리할 때 누군가가 실수로 함께 잘라버렸나 보다. 집안에 두고 키우는 식물은 전적으로 아내가 관리했는데, 전문가가 그랬을 리는 없고 아마도 내가 그랬나 보다. 내가 나빴다.

<1년 전, 수많은 도전 끝에 싹 틔운 아보카도를 작은 화분에 옮겼다>

 아보카도와의 인연은 2004년 우연한 기회로 아내와 함께 떠난 미국 여행에서 시작되었다. 버터같이 부드럽고 노랗게 색감 고운 음식을 빵에 발라 먹었는데 그 맛이 아주 특별했다. 입 짧은 나도, 명품 입맛 아내도 홀딱 반했다. 음식 정체가 실은 '과일'이라는 말에 우리 두 사람은 한 번 더 놀랐다. '과일에서 어떻게 이런 맛(아무 맛도 아니지만 모두의 맛)과 식감이 나지?' 신세계를 경험했다. '미제'라서 그런가 보다 실없는 농담도 했다. 


 아보카도는 악어 등처럼 생긴 껍질 때문에 '악어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원산지는 멕시코(남미)다. (미국에서 개량한 품종도 있기는 하지만) 아보카도 입장에서는 생존에 최적화된 형태로 진화했지만, 포식자인 인간 입장에서는 다소 비효율적인 과일이다. 과육에 비해 씨가 너무 크다. (망고도 씨는 크지만 과육은 더 크지 않은가!) 어떤 과일보다 지방 함량이 높고 탄수화물과 단백질, 거기에 비타민 함량까지 높아 슈퍼푸드로 각광받고 있다. 미국 여행 후 한동안 까맣게 잊고 살다가 한 백화점 식품관에서 우연히 '아보카도 비빔밥'을 아내와 먹으면서 미국 여행 기억이 소환되었고, 그 후 아보카도는 자연스럽게 우리 집 단골 식재료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즈음 즐겨보던 음식 만화 '오므라이스 잼잼'에서 아보카도 싹 틔우기 비법을 전수받아 수차례 연구를 거듭한 끝에 성공했다. 아보카도가 싹 틔우는 시점은 아무도 모른다고 할 만큼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걸 해낸 것이다.  

<1년 동안 이만큼 자랐다>
<잘려 나간 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었다>

 주 성장 줄기가 잘려나간 아보카도를 한 달 내내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지난 주말에 깜짝 변화가 생겼다. 줄기를 뚫고 새로운 성장 줄기가 솟아오른 것이다.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며 아내는 당연한 일인 양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다려 보라고 했지!" 아내는 마치 미래와 어떤 비밀스러운 거래를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두 내다본 사람처럼 말했다. 맞다, 혼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보카도에게 맡기면 시간이 해결해줄 터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새로 옮긴 화분에 다량의 영양분이 포함되어 있어서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분갈이할 때 뿌리를 보호하기 위해 기존 화분의 흙을 그대로 옮겨 심었다. 화분은 커졌지만 기본은 같다. 물론 한 달 사이에 조금 더 넓고 깊게 뿌리내렸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 이유를 공간에서 찾았다. 빈 공간, 여백(餘白). 살아있는 생물로서 아보카도가 생장하기 위해서는 뿌리 역시 동시에 생장해야만 한다. 그런데 기존 작은 화분에서 아보카도 뿌리는 생장을 멈추었다. 더 이상 뻗어나갈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 상태에서 줄기만 자란다면 아보카도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생명 유지를 위해 생장을 멈추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큰 화분으로 옮기자 여백이 생겼고, 이를 알아차린 아보카도는 다시 생장을 이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의지(의식)는 영양분(물질) 보다 더 강하게 작용했다. 아보카도의 놀라운 변화에 대해 내가 도달한 (합리적) 추론이다. 


 생기를 되찾은 아보카도를 보면서 문득 아이들(진짜 우리 아이들)과의 관계가 떠올랐다. 내(부모) 역할은 그저 큰 화분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닐까? 그 안에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을 필요는 없다. (그럴 수도 없고) 그것은 부모의 욕심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 넓은 공간을 내어주고 스스로 성장하기를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아이들은 뿌리내릴 충분한 공간이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혼자서도 잘 해낼 것이다. 성장 줄기가 잘려나간 아보카도가 스스로 새로운 줄기를 잉태하는 것처럼 아이들도 껍질을 부술 수 있는 잠재된 가능성을 믿어 주기만 하면 된다. 마치 내 아버지처럼 말이다. 한때 칭찬도 잔소리도 하지 않으시던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있었다. 아빠가 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다. 아버지는 진정 위대했다. 몸에서 사리(舍利)가 나온다는 말이 농이 아님을 매일매일 절감한다. 그러니 아이를 위한다는 거창한 명분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여백을 주고 스스로 성장하기를 믿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아보카도가 깨우쳐 준 삶의 교훈 하나를 오늘도 곱씹어 본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언젠가 해외 일부 국가의 레스토랑에서 'Avocado Free'를 내세운다는 뉴스를 보았다. 아보카도가 PC(정치적 올바름) 이슈로 자주 등장하는 탓이었다. 아보카도가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돈줄이라거나 칠레 정부의 부실한 정책과 맞물려 수자원 고갈을 일으킨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슈퍼푸드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자 아보카도 농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2010년 약 450톤에 불과했던 수입량이 2020년에는 약 1만 3300톤으로 서른 배 가까이 늘었다. 돈이 모이는 곳에는 부패한 권력과 폭력이 모이기 마련인가 보다. '숲 속의 버터'라는 정겨운 별명이 '피의 아보카도'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으로 불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보카도에 투사된 인간의 욕망이 폭력과 부패를 낳았다. '공정무역'으로 재배되는 아보카도는 없는지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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