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아픔을 공감한 4.3평화공원

탐라유람기 아들 둘과 제주 한달살이 이야기

by 조이홍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故 노무현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제주 4.3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그로부터 12년 후 문재인 대통령도 제70주년 제주 4.3 사건 희생자 추념식에 참여해 4.3 사건의 완전한 해결과 함께 이념이 드리웠던 적대의 그늘을 걷어내고 인간의 존엄함이 꽃피울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제71주년인 올 해는 배우 유아인이 추념식에 참석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추념사에서 4.3 사건에 대해 몰랐던 자신이 부끄럽고 4.3을 기억하자는 메시지를 남겼다. 여기 부끄러운 사람 한 명 더 있다. 사실 나도 4.3에 대해서는 몰랐다. 그저 제주사람이 많이 희생되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제주 한달살이를 준비하면서 4.3 사건만큼은 공부를 해 두기로 했다. 약간의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가슴 아픈 역사지만 준, 큐 형제에게도 말해 주어야 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43평화공원_1.jpg <4.3 희생자의 사진이 걸려있는 6관>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해방과 분단의 공간에서 촉발된 우리 역사의 어둡고 아픈 부분이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이 2만 5천 ~ 3만 명 희생되었다. 당시 제주 인구의 1/9이나 된다고 한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약 1만 5천 명이다.) 더욱이 희생자의 33%가 어린이, 여성, 노약자라는 점은 이 사건이 이념 대립을 넘어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했던 비인간적인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86%가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고, 진압과정에서는 군인 180명, 경찰 140명도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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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평화공원은 슬픈 역사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제주도민과 희생자를 위로하고 잔인하고 아픈 역사지만, 이를 통해서 화해와 평화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2008년 문을 열었다. 크게 평화기념관 (전시실)과 위령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평화기념관은 역사를 기록한 공간으로 사건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 유가족 기록, 역사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4.3 사건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작품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나는 1관 '역사의 동굴'에 있는 누워있는 백비 (비문 없는 비석)가 눈에 밟혔다. 아직도 제대로 된 이름이 없는 이 비극적 사건이 언젠가 해결되면 비문도 새기고 누워있는 비도 바로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정의가 세워질 그 날이 빨리 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또한 1948년 11명의 민간인이 토벌대에 의해 질식사한 다랑쉬 동굴을 재현한 전시관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긴박했던 피난생활과 학살 상황을 발굴 당시의 상황 그대로 재현해 사실감을 더해 주었다. 전시실을 조금만 꼼꼼하게 봐도 4.3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었다. 장난꾸러기 준, 큐 형제도 전시실에서는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각종 전시물을 하나하나 꼼꼼히 보았다. 특히 큐는 애니메이션으로 4.3 사건의 배경을 설명한 <4.3의 새벽> 전시공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내가 더 설명해 줄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위령공원은 비설(희생자 변병생 모녀의 기념 조각), 위령탑, 귀천(4.3 당시 민간인들의 죽음의 이미지와 전래의 수의를 모티브로 한 조형물), 각명비(희생자의 성명, 성별, 당시 연령, 사망 일시 장소 등을 간결하게 기록한 비석), 위패봉안실(4.3 당시 희생된 희생자의 신위 14,120여 기가 봉안), 위령 광장, 행방불명인석(시신을 찾지 못해 묘가 없는 행방불명인을 대상으로 개인 표석을 설치해 넋을 추모하는 공간) 그리고 봉안관(2006년부터 2011년까지 발굴된 유해를 봉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령탑을 중심으로 들어선 각명비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숙연해졌다. 공간이 주는 분위기에 압도되어서인지 큐도 말없이 각명비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4 ~ 5살 아이도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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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2층에는 전국 청소년 4.3 문예공모 만화 부분 입상작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픈 역사를 다양한 방법으로 미래 세대에 알려주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한 권 샀다. 숙제 없는 제주 놀기가 목표였지만 오늘은 준, 큐 형제에게 책 읽기 숙제를 내주려고 한다. 그리고 나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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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알아두면 좋을 순이삼촌 이야기>


1978년 9월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현기영의 중편소설로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이 소설을 발표한 작가는 고문을 당하는 등 개인적인 고초를 겪었지만 이 작품을 외부에 알림으로써 4.3 사건에 대한 연구가 비로소 활발해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잔혹한 학살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순이삼촌의 삶과 죽음을 담담하게 기록하면서 4.3 사건의 참혹상을 고발하고 동시에 30년간 묻혀 있던 사건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시킨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나는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8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 거기서 나는 순이삼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순이삼촌은 작년 한 해 우리 집에 와서 식모 노릇을 했다. 그녀는 아내와 쌀 문제로 말다툼을 하고 제주로 돌아갔다. 그녀를 데리러 온 사위로부터 순이삼촌에게 환청 증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몇 해 전에 이웃집에서 메주콩을 잃어버린 일로 범인으로 오해받으면서 환청이 시작되었다. 경찰서에 가서 시비를 가리자는 말에 주저앉아버렸다. 1949년에 있었던 마을 소각 때 심한 정신적 상처를 입어 군인이나 순경을 기피했는데 이 사건으로 결벽증과 환청 증세까지 온 것이다.


30여 년 전 국군에 의해 학교 운동장에 소집된 마을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무참하게 참살당했다. 그 학살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순이삼촌은 평생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식을 둘이나 묻은 그 옴팡 밭에서 사람의 뼈와 탄피 등을 골라내며 30년을 과부로 살아오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순이삼촌의 자살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 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삼신 년 전 그 옴팡 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우여곡절 한 유예를 보내고 마침내 오늘에야 그녀의 가슴 한 복판을 꿰뚫은 것이다.

그 시간(자정)이면 이 집 저 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 집 저 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중략)
아, 한날한시에 이 집 저 집에서 터져 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위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순이삼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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