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새겨진 정방폭포

탐라유람기 아들 둘과 제주 한달살이 이야기

by 조이홍

제주 한달살이를 계획하면서 나름 이것저것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일과를 마감할 때면 언제나 아내와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내일은 뭐하지?” 이럴 때마다 예전에 엑셀로 여행지 정리하던 때가 그립기도 했다. 아이들이 아무리 좋아해도 매일 같은 바다를 데려가면 조금씩 지루해했다. 물론 큐는 어디를 가든 낚시만 하면 상관없었다. 아내와 나는 밤마다 제주 공부를 했다. 날씨가 좋으면 선택의 폭이 다양했지만 비라도 오는 날이면 선택의 폭이 훨씬 줄어들어 걱정이 늘어났다.


물론 언제라도 꺼내 놓을 수 있는 히든카드 몇 장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정방폭포다. 준이 두 살 때 처음으로 정방폭포를 갔는데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준은 아직 아기였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준이었는데 이제는 동생과 나누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그 심정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그러니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안아주어야지 다짐하곤 하는데 잘되지 않는다. 아무튼 그때부터 정방폭포는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폭포로 시원한 폭포수가 그리울 때면 한 번씩 찾게 되는 곳이다. 높이 23m, 너비 8m 규모로 동양에서 유일하게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로 언제 보아도 그 웅장함에 넋을 놓고 보게 된다. 특히 폭포에서 떨어진 물보라가 작은 물방울이 되어 얼굴을 간지럽히는 느낌도 참 좋았다.

정방폭포는 천제연폭포, 천지연폭포와 함께 제주도 3대 폭포로 불린다. 입장료(어른 2천 원, 어린이 1천 원)를 내고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있는 계단을 5분 정도 걸어 내려오면 바로 정방폭포가 보인다. 바다 앞으로 하얗게 떨어지는 폭포수는 양 옆의 암벽과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다. 준, 큐 형제는 물보라를 받아먹으려고 입을 벌린 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궂은 날씨였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폭포 앞은 붐비고 있었다. 모두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우리도 인생 사진 한 장 건져 보려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포즈를 취하기에 바빴다. 어느 관광지에서나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곳 정방폭포에도 가슴 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이곳이 서귀포 일대 최대의 학살터였다는 것이다. 정방폭포와 그 부근인 소남머리는 최소한 여섯 차례 이상 대학살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특히 살인 경험이 없는 사병들의 실습용으로 양민들을 이용했다는 사실은 충격을 더해 주었다. 제주 4.3 사건은 이렇게 아름다운 제주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비 때문인지 폭포수 때문인지 모르지만 흠뻑 젖은 우리는 정방폭포 위에 있는 서복전시관에 들러보기로 했다. 정방폭포 벽에 새겨진 서불과지(徐巿過之) 유래와 전설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어서 가볼만한 곳이다. 아내는 보고 싶어 하던 전시회가 있어 주차장 맞은편에 있는 왈종 미술관에 갔다. 제주 곳곳에 크고 작은 미술관이나 전시관이 많이 생겼다. 자연을 감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공연이나 전시회도 많아진 것이다. 제주를 자주 찾는 여행객 입장에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찾은 서복전시관은 입장료가 무척 저렴했다 . (어른 500원, 청소년 300원) 2003년에 개관했는데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전시관에는 서복상을 비롯해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 등 진시황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둘러보기에는 전시가 다소 무거운 것 같아 산책하듯이 보고 일찍 나왔다.

아내는 꽤 오랜 시간을 왈종 미술관에서 보내고 나왔다. 작품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미술관 앞에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어 커피 한잔 마시자고 했더니 집에서 시원한 아이스커피 타 왔으니 그거나 마시자고 한다. 커피 값 아껴서 전시회 한 번 더 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단다. 아내를 따라가려면 나는 아직 멀었다.



<아빠가 알아두면 좋을 서불과지 전설 이야기>

서복은 서불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제(齊) 나라에서 태어났다.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신선사상의 영향을 받아 방사 (천문·의학·신선술·점복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불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한라산)을 찾아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리고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하였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정방폭포의 경치에 취해 절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글귀를 새겨 놓고 서쪽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서귀포의 지명 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는 설이 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서불이 불로장생을 바라는 시황제에게 바다 건너 봉래산(蓬萊山)과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라는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산다고 글을 올렸다. 시황제는 서불에게 동남동녀 수천 명을 딸려 신선을 찾아보도록 파견하였다. 서복은 무리를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평원광택(平原廣澤)에 도달하여서는 그곳에 머물러 스스로 왕이 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불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 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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