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유람기 아들 둘과 제주 한달살이 이야기
전쟁이나 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여행하는 것을 다크 투어리즘 또는 블랙 투어리즘이라고 한다. 평소 즐겨 듣는 <탁PD의 여행수다>라는 팟캐스트에서 원자력 발전소 화재로 방사능이 유출되어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한 도시 체르노빌을 여행한 어느 여행가의 에피소드가 소개되었을 때 처음 듣게 되었다.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는 역사에서, 과거의 잘못에서 배우고 반성하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립국어원에서 다크 투어리즘을 ‘역사교훈여행’으로 우리말 다듬기를 한 것은 조금 투박해 보여도 참 정직한 표현인 것 같다.
제주의 대표적인 다크 투어리즘 장소는 4.3 평화공원과 함께 대정읍 송악산 일대가 아닌가 싶다. 제주도 서남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송악산은 20여 년 전에 마라도 가는 여객선을 타기 위해 한번 들르고 이내 줄곧 잊고 있었던 곳이다. 사실 그때는 여기가 송악산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래도 해안가 절벽 군데군데 보이던 동굴이 꽤 인상적이었는지 그것만은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이번 한달살이 때 4.3 평화공원도 둘러보고 송악산도 다시 찾아본 일은 꽤 잘한 것 같다.
패망 직전 일본은 제주를 최후의 보류로 삼아 대대적인 병력을 투입하였다. 제주 곳곳에 군사시설을 설치했고 그 흔적이 아름다운 제주의 상처로 남아 있다. 일제가 판 진지동굴이 대략 700여 개라고 하는데 송악산 능선과 해안에서 발견된 진지동굴만 60개가 넘는다. 송악산 해안 진지동굴은 해상으로 들어올 연합군의 함대를 막기 위해 송악산 절벽을 뚫고 이 안에 소형 선박을 숨겨놨다가, 폭탄을 싣고 자살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서였다. 진지 구축을 위한 노역에 제주 주민들이 강제동원, 희생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현재 송악산 일대에 15개의 진지동굴이 남아 있다. 처음 이 동굴을 봤을 때는 자연동굴인 줄 알았는데 이런 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송악산 북쪽 자락에 있는 섯알오름에는 일본군의 대공포 진지와 제주에서 가장 큰 진지동굴이 있다. 형제섬, 산방산, 한라산까지 섯알오름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그림 같다. 이 아름다운 오름에 전투 사령실, 병사, 탄약고, 연료고, 비행기 수리 공장, 통신실 등 중요 군사 시설을 감추기 위한 진지동굴을 구축한 것이다. 일본군이 섯알오름에 대형 지하기지를 구축한 이유는 알뜨르 비행장 때문이다. ‘아래 있는 넓은 뜰’이라는 정겨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알뜨르는 주민들이 농사를 일구고 살던 삶의 터전을 군용 비행장으로 만든 것이다. 전쟁의 막바지에 일본이 감행한 가미카제 훈련이 이곳에서 이뤄졌다고 전해진다. 넓은 들판 가운데 곳곳에 20개의 격납고가 있으며 현재는 19개가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송악산 둘레길을 따라 산책을 했다. 오늘 날씨는 유난히 좋았다. 둘레길 정상에서는 최남단 마라도, 가파도, 형제섬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태평양을 만날 수 있었다. 올레 7코스로 단련된 준, 큐 형제에게는 쉬엄쉬엄 오르는 언덕 같은 코스였다. 주차장 바로 앞에 최남단 별다방이 있었지만 왠지 오늘은 이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센스 있는 아내가 집에서 타 온 봉지커피를 마시며 집으로 돌아왔다. 진지동굴을 한참이나 바라본 준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뒤로 보이는 붉은 석양이 유난히 아름다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