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요, 결핍은 창조의 아버지다
어렸을 적 우리 집에는 장난감이 없었다. 그 흔한 조립식 로봇 하나 없었다. 팩을 끼워 다양한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게임기는 말할 것도 없다. 말단 경찰 공무원이셨던 아버지 박봉으로 딸 부잣집 귀한 막내아들에게 변변한 장난감 하나 장만해 줄 형편도 안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합리주의자이자 실리주의자인 어머니께 무언가 큰 그림이 있으리라 믿었다. 어린 나이라도 장난감이 없어 불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장난감이 없어도 놀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장난감의 부재는 무한한 창조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DIY(do it yourself)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대에 스스로 장난감을 만들어 놀았다. 가장 기본이 되는 건 딱지다. 요즘 잡지 표지 같은 빳빳하고 질 좋은 종이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잘해야 라면상자나 신문지, 철 지난 탐구생활, 수준 높은 교양지 선데이 서울(이 잡지를 읽을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집에 왜 있었지?)이 전부였다. 딱지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만들 수 있었지만, '복따' 만큼은 아무나 만들 수 없었다. 복따는 잘 넘어가지 않는 무적의 딱지를 말했다. 복이 福에서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딱지치기 방식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테니, 넘어가지 않는 딱지를 가진 아이가 오늘날 마블 세계관과 필적하는 '딱지 세계관'에서 얼마나 대단한 위세를 떨쳤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만들기도 무척 어려웠다. 장인의 노력과 정성이 필요했다. 먼저 두꺼운 종이로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의 딱지를 접는다. 큰 딱지가 무작정 유리한 건 아니다. 너무 크면 아이들이 끼워주질 않았다. 만들어진 딱지를 물에 적신 후 물기를 빼고 따뜻한 아랫목이나 부뚜막에서 반나절 정도 말린다. 이 과정을 두세 차례 반복한다. 다음으로 고운 흙에 딱지를 정성스레 갈아준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지면에 찰싹 붙는 절대 딱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복따는 일반 딱지 백 개와도 바꾸지 않았다. 아이들은 복따를 만들거나 따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했다. 복따는 있어도 왕따는 없던 시절이었다.
나무칼, 새총, 고무줄총, 볼펜 총, 닌자 수리검도 손수 만들었다. 나무칼은 길고 곧은 나무만 있으면 쉽게 만들 수 있다. 당시 우리 집 마당에는 큰 아궁이가 있어 땔감용 나무가 많았다. 적당한 나무를 골라 톱으로 자르고 못질을 하면 나무칼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지금 아이들이 집에서 톱질하고 망치질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어른도 흔하지 않은 일임은 물론이다) 서너 개 만들어 사촌 동생들과 칼싸움하고 놀다가 손가락을 다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새총은 기저귀용 노란 고무줄과 헝겊(또는 레자), 나무로 만든다. Y자 형태의 나무를 구하거나 칼로 깎아야 해서 만드는 게 쉽지만은 않다. 일단 하나 만들면 천하무적임은 말할 것도 없다. (결코 사람을 향해 발사한 적은 없었다). 고무줄총은 나무젓가락과 노란 고무밴드만 있으면 10분이면 뚝딱 만든다. 고무줄을 맞아도 살짝 따끔한 정도라 방 안에서 가지고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볼펜 총은 다 쓴 모나미 볼펜 두 자루로 만든다. 볼펜 심이 총알이 되고 스프링 2개와 볼펜 꼭다리가 총의 공이 역할을 한다. 당시 우리 집 방문은 대부분 문창호지가 발라져 있었는데 볼펜 총으로 숱하게 구멍을 만들어내 어머니께 꾸중을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혼나고 돌아서면 까먹고 다시 방문을 향해 발사하는 걸 보면 둘째 아이의 엉뚱함이 어디서 왔는지 대충 짐작 간다.
닌자 수리검은 바늘과 성냥개비 4개, 실 그리고 색종이(또는 껌종이)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 성냥개비를 2개씩 2층으로 만든 후, 앞에는 바늘을 넣고 뒤에는 날개를 꽂은 다음 실로 꽁꽁 묶어주기만 하면 된다. 뒷부분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두었다가 던지면 그렇게 폼날 수 없었다. 닌자 수리검에 얽힌 웃픈 이야기도 있다. 한 번은 닌자 수리검을 가지고 놀다가 그만 천장으로 날아가 꽂힌 적이 있었다. 키가 닿지 않으니 언젠가는 떨어지겠지 했다. 그날 저녁 온 가족이 모여 저녁밥을 먹는데 그만 닌자 수리검이 막내 누나 머리로 떨어져 꽂혔다. 누나는 바늘이 머리에 꽂힌 줄도 모르고 계속 밥만 먹었다. 넷째 누나와 눈이 마주친 나는 싹싹 빌고 얼른 닌자 수리검을 등 뒤로 감췄다. 귀여운 막내라도 도를 넘은 장난이었고 들켰다면 부모님께 큰 꾸중을 들었을 게 뻔했다. 넷째 누나는 아직도 그 비밀을 지켜주고 있지만, 사실 오래전에 막내 누나한테 사과했더랬다.
물론 말썽 일으키는 장난감만 만든 건 아니었다. 창의력 및 지적 능력 그리고 운동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장난감들도 많이 만들었다. 스케치북과 색연필이면 가능했다. 가장 많이 만든 건 미로였다. 복잡한 미로를 고안해서 사촌 동생과 서로 누가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는지 시합했다. 지금은 서점에서 흔하게 구입할 수 있는 미로 게임이지만, 그때는 직접 그려가며 놀았다. 너구리나 동킹콩 같은 오락실 게임도 스케치북에 그려서 가지고 놀았다. 배경과 캐릭터, 조이스틱까지 그린 후 입과 손을 이용해 플레이했다. 이런 게임들은 당시에도 오십 원이면 할 수 있었다. 돈이 없어서 그렇게 논 건 아니었다. 캐릭터와 장애물을 직접 만들다 보니 스토리텔링 하는 재미가 있었다. 게다가 오락실 게임은 혼자 해야 하지만 이렇게 놀면 여럿이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여럿이 함께 놀 수 있는 장난감이라면 '국기 놀이'도 빼놓을 수 없다. 이건 스케치북 한 장이면 10명 이상 놀 수 있었다. 스케치북을 손바닥 반 정도 크기로 잘라 각각 종이에 국기, 대장, 대령, 병장, 헌병 등을 적는다. 두 팀으로 나눠 상대팀 국기를 먼저 잡으면 승리한다. 국기는 대장, 대령, 헌병을 잡을 수 있는데 병장은 잡을 수 없다. 상대팀 중 누가 국기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 치열한 심리전과 두뇌 싸움, 그리고 계속 뛰어다녀야 하니 체력이 필요한 장난감인 셈이다.
종이비행기는 또 어떤가? 다 쓴 공책 한 장 쭉 찢어 비행기를 만들면 반나절은 놀았다. 우리 집은 터널 위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날리면 비행기가 한참(1분 이상)을 날았다. 땅에 떨어진 비행기를 다시 주워 오는데 10분 이상 걸렸지만 그게 재미였다. 솔직히 다 쓴 공책보다 쓰지 않은 빳빳한 공책이나 종합장이 더 좋았다. 어머니 몰래 쓰지 않은 공책을 찢어 비행기를 만든 적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금도 비행기 만드는 법을 대여섯 가지는 알고 있는데 당시에는 더 많이 알았던 것 같다. 일반적인 비행기 이외에도 공기의 흐름을 타면 오래 날 수 있었던 파마 비행기(날개를 연필로 돌돌 말아 만듦)나 아주 멀리 날 수 있던 로켓 비행기(명칭은 정확하지 않다) 등을 만들어 놀았다. 당시에도 학교마다 고무동력비행기 날리기 대회가 있었는데 어머니를 졸라 딱 한 번 참가한 적이 있었다. 결과는 비참했다. 10초도 날지 못했다. 종이비행기보다 오래 날지 못했으니 무척 속이 상했다. 이천 원이었던 고무동력비행기를 사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 절반이 짜장면을 먹었을지도 몰랐다.(내가 기억하는 당시 짜장면 가격이 오백 원이었으니) 고무동력비행기 대회 이후 내 종이비행기 사랑은 더 깊어 갔다. 더 멀리, 더 오래 날리기 위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겨울에는 썰매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도 얼음 위와 눈 위를 달리는 썰매가 달라야 한다는 걸 알만큼 영특했나 보다. 눈 위에서는 비료 포대로도 충분했지만, 얼음 위에서는 천하의 비료 포대도 어림없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한 번은 누나들이 아끼는 스케이트를 가져다 날을 빼내 썰매를 만든 적이 있었다. 스케이트 날로 만든 나무 썰매는 얼음 위 최강자였다. 굵은 철사로 만든 썰매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온종일 신나게 썰매를 타고 돌아왔는데 집안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누나들 눈이 퉁퉁 부어 있는가 하면 날 보는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오는 듯했다. 그날 저녁밥을 먹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큰 그림'은 이랬다. 귀한 아들이 창의적이고 지혜로우며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회성을 갖춘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결코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 시절, 넷째 누나가 두꺼운 철학책 면지에 '가난은 조금 불편할 뿐이다'라고 적어 놓은 걸 보았다. 가난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내게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또한 직접 움직여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그때 터득했던 잡다한 기술(?)들로 우리 아이들에게도 요긴하게 써먹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요, 결핍은 창조의 아버지다." 뭐 대충 이런 말로 어머니의 큰 그림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을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디지털과 풍요(소비)의 시대가 아닐까 싶다. 양극화나 헬조선이라는 말처럼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FACTFULNESS>의 저자 한스 로슬링이 지적한 바처럼 과거와 비교해 놀랍도록 성장한 우리 사회의 긍정적인 면들을 애써 외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도 현재 우리 사회는 40년 전과 비교해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정보가 독점되던, 정보가 곧 힘인 시대는 민주화를 지나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만인의, 만인에 의한, 만인을 위한 전유물이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가 수십 년을 공들여 연구한 결과를 단 몇 줄의 요약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공짜다. 자원을 재취해 물건을 만들고 그 물건을 폐기하기 위해 다시 자원을 투입한다. 연간 버려지는 음식물은 또 얼마나 많은가! 결핍이 결핍된 시대다.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만한 책을 참고하기 위해 가끔 방문하는 독서 관련 카페가 있다. 그곳 자유게시판에 올라오는 부모님들의 글을 보면 게임에 빠진 아이, 책을 읽지 않는 아이, 공부에 흥미가 없는 아이,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아이 때문에 고민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오죽 답답하면 카페에 글을 올려 같은 처지의 부모들에게 조언을 얻으려고 할까? 나 역시도 그런 고민에서 결코 자유롭지는 않았다. 다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이에게 무엇을 더 해야 한다고 강요한들 그 말이 아이에게 제대로 작동할까? 좋은 책을 읽고, 함께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는 것도 훌륭한 방법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전에 지금 아이가 속해 있는 환경이 어떤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부모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웬만한 노력으로는 결코 아이를 자신들의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쉽게 포기할 수도 없다. 결국 아이 스스로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동기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 경우 그것은 '결핍'에시 비롯되었다. 지혜와 통찰력을 갖게 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그 자리를 일찌감치 쾌락과 욕망이 차지해 버렸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이제 결핍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