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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Aug 04. 2021

어떤 이의꿈

한뼘소설

 대기업 임원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마흔다섯 살 K는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노랑 모자를 쓰고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가 벌써 중학생이 되었으니 휴가를 떠났던 게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일에 치여 사람에 치여 떠난 휴가인지라 인적이 드문 어촌 마을 근처 마당이 예쁜 이층 집을 빌렸다. 오랜 시간 독박 육아와 가사 전쟁을 담담하게 감내해 준 아내와 자신의 오랜 부재에도 불평 한번 하지 않았던 아이에게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물론 이러한 바람이 오글거리는 대화나 애정 가득한 눈빛만으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K는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는 선배들의 조언대로 아내에게는 계열사 최고급 호텔에서 운영하는 스파와 요가 프로그램을 예약해 주었고, 아이를 위해서 국제 서핑대회 수상 경력이 있는 프로 선수에게 강습을 의뢰했다. 마침 회사가 몇 년째 국제 서핑대회를 후원해 관계자들과 인맥을 쌓은 덕분이었다. 아내와 아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K는 가져간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며 제주 맥주의 색다른 매력에 흠뻑 취했다. 휴가가 뭐 별건가 싶었다. 그는 모처럼의 게으름이 마음에 들었다. 


 정오가 한참 지난 늦은 오후, 출출해진 K는 요기도 할 겸 동네 산책을 나섰다. 처음 이곳에 오던 날 동네 어귀에서 아담한 식당을 본 게 기억났다. 한적한 해안도로를 이십여 분쯤 걸어가니 아담하게 차려진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살림집을 겸하는지 뒤편으로는 작은 마당이 딸린 안채가 보였다.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테이블 두 개가 고즈넉하게 놓여 있었다. 사장이자 주방장은 앳되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메뉴는 짬뽕과 피자 둘 뿐이었다. 왠지 제주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나와버릴까 했지만 달리 갈만한 다른 식당이 없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짬뽕과 수제 맥주를 주문했다. 주문한 맥주가 먼저 나왔다. 시원한 맥주가 식도를 타고 흐르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 있는데 장사 잘 되나요?"

 "이래 봬도 매일 만석이죠. 가게가 워낙 넓어서요. 하하하. 개업한 지 1년쯤 됐는데 다녀간 손님들이 SNS에 올려주셔서 갈수록 바빠지고 있습니다."

 "아이 있으세요? 애 낳으면 돈 들어갈 데도 많은데 작은 식당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감당하기 힘들 텐데요?" 

 "아내가 만삭입니다. 아이 태어나면 주 5일 영업을 4일로 줄이려고요.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요. 그러려고 서울 생활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거니까요." 

 "꿈꾸는 걸 보니 아직 젊네요. 부럽습니다. 하하하." 


 그때 마침 주문한 짬뽕이 나왔다. 겉보기에는 그저 그렇게 보였다. K는 국물을 떠먹어 보았다. 딱 한 숟갈만으로도 주방장의 솜씨를 파악할 수 있는 그였다. 짬뽕 국물이 혀에 닿자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짜릿한 전율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웠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맛이었다. 황홀하다느니 환상적이라느니 하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가 아는 언어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었다. K는 다시 몇 숟갈을 연거푸 떠먹었다. 얼른 젓가락을 들어 면발도 맛보았다. 세상에 없는 쫄깃함이 혀를 감싸고돌았다.  


 "짬뽕 맛이 예술인데요? 사장님, 혹시 프랜차이즈 하실 생각 없으세요?" 

 "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쑥스럽네요."

 "사실 제가 OO기업에서 프랜차이즈 사업을 관리하는데 사장님만 관심 있으면 뭔가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까 저한테 꿈꾼다고 하셨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손님 꿈을 여쭤봐도 될까요?" 

 "제 꿈이요? 글쎄요. 가능하면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CEO까지 도전해 보고 싶은데요?"

 "그다음에는요?" 

 "제 이름 걸고 회사도 하나 차리고 싶고요." 

 "그다음에는요?" 

 "책도 쓰고 후배들도 양성하고요. 고향이 부산인데 은퇴하면 바닷가 근처에 집 짓고 아내와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야죠. 아이가 결혼해서 손자도 하나둘 쯤 있어 재롱도 보면 좋겠네요." 

 "은퇴하실 때쯤이면 나이가...?"

 "100세 시대니까 한 일흔 살쯤 되지 않을까요?" 

 "제 나이가 올해 서른 하나입니다. 손님이 일흔 살에 이루고 싶은 꿈을 전 이미 서른 살에 이루었습니다."


 K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는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사실 그 길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자기만 그랬던 건 아니다. 자기 또래 남자라면, 가장이라면 대부분 그랬다. 오늘 그는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걸 알았다.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K는 저녁 식사 장소로 예약해 두었던 고급 일식집에 양해를 구했다. 마을 공판장에 들러 이것저것 장을 보았다. 그가 직접 요리를 했던 게 언제였던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오늘 저녁만큼은 왠지 아내와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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