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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10. 2021

눈물 젖은 귤과 눈물 나무

아내는 그리고 남편은 쓰다 <그림 에세이 - 제주를 그리다>

 아내를 '하늘'로 받들며 모시고 살지만 가끔 도끼눈을 하고 대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이것 봐라, 요즘 잘해주니까 살살 기어오르는구나!' 하는 눈빛으로 패왕색 패기를 내뿜으며 반란의 싹을 지근지근 짓밟아버린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목놓아 부르짖다가도 이내 반항으로 잃을 건 '가정의 평화'요, 고작해야 얻을 건 '서 푼도 안 되는 자존심'이라는 삶의 소중한 진리를 깨닫는다. 부부 사이에 얼어 죽을 자존심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부조화 압력'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내린다. 그럼 언제 그랬냐는 듯 도끼눈은 금방 순한 토끼눈으로 돌아온다. 


 아내와 아이들이 똘똘 뭉쳐 나를 '시골 사람'으로 만들 때면 가끔 혈관을 타고 흐르던 '저항의 DNA'가 깨어난다. 나도 모르게 장화 신은 고양이의 호수 같은 눈망울이 도끼눈으로 변한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슬라이스 치즈를 못 먹어봤다고 하면 아내는 아이들에게 '아빠는 어렸을 적에 시골에 살았잖아."라며 날카로운 핀으로 나를 시골 사람으로 고정시켰다. 버거킹이나 맥도널드, 피자나 스파게티 같은 이야기를 할 때도 그랬다. 우리 마을에 원래 없던 것이었으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럼 의례 같은 말이 들려온다. '아빠 어렸을 때 시골 살았잖아."


 며칠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추석을 전후해서 냉장고에 탐스러운 빨간 사과가 그득했다. 보통은 아내가 먹기 좋게 깎아주지만 왠지 그날은 어릴 때처럼 사과 하나를 통째로 들고 베어 먹고 싶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그렇게 사과를 먹는 게 낯설고 신기한지 서로 '한입만'을 외쳤다. 사과를 먹으며 추억에 젖어들자 뱉지 말아야 할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사과가 토끼 모양으로 예쁘게 깎아서 먹는 과일이란 걸 성인이 되고 알았잖아. 어릴 적에는 옷에 쓱쓱 닦아서 베어 먹는 것만 알았지. 접시에 예쁘게 담아서 포크로 찍어 먹는 과인인 줄 몰랐어." 말을 꺼내놓고서 아차 싶었다. '시골 사람' 프레임을 만든 건 어쩌면 나 자신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젯밤에는 모처럼 바나나를 먹었다. 바나나는 식탁 한 편에 언제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내게 바나나란 토마토를 갈아 마실 때 함께 넣는 과일이었다. 웬일인지 그런 바나나를 날 것 그대로 먹어보고 싶었다. 바나나 껍질을 벗기며 또 불쑥 옛날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이 정도면 입이 화근이다.) "어릴 적에는 바나나 하나 먹어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는 흔한 과일이라 쳐다보지도 않네." 말 끝나기가 무섭게 아내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바나나는 서울에 살든, 시골에 살든 귀한 과일이었다. 그 시절에도 바나나를 다발로 먹던 아내는 시골 소년의 순수한 갈망을 이해하지 못했다.   


 국민하교 다닐 때 50명이 넘는 반 친구 중에 바나나를 먹어 본 아이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아니 한 학년이나 학교를 통틀어 그럴지도 몰랐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바나나는 그림책에서나 보던 과일이지 실재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던 '전설의 과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척 결혼식에 참석차 아버지와 함께 서울 나들이에 나섰던 어머니가 늦은 저녁 내 앞에 검은 봉지 하나를 내려놓았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던 어린 내가 봉지에서 꺼내 든 것은 노오랗고 탐스러운 바나나 한 개였다. 두 개도 아니고 딱 한 개. 어머니는 혼자 있을 때 얼른 먹으라며 바나나 껍질을 벗겨주었다. 실제 바나나를 먹어보리라는 상상조차 못 했던 시절이었다. 껍질이 3분의 2 가량 벗겨진 바나나를 움켜쥐었다. 하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떤 마음가짐, 어떤 기대로 먹어야 할지 몰랐다. 눈을 감고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날 먹은 바나나의 맛이나 식감은 기억나지 않지만, '드디어 나도 바나나를 먹었다.'라는 묘한 성취감은 꽤 오래도록 남았다. 


 한 동안 부모님이 서울에 가실 일만 생기기를 바랐다. 부모님의 서울 나들이는 바나나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공식이 이미 어린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기회가 찾아왔다. 게다가 이번에는 나도 서울 나들이에 동참하기로 했다. 다시 바나나를 맛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온 첫 번째 바나나와는 달리 두 번째 바나나는 그 맛을 충분히 음미하리라 단단히 마음먹었다. 어머니가 함께 갈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아무리 무뚝뚝한 아버지라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확신이 설마로, 설마가 좌절로 바뀌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비싼 바나나를 끝까지 사주지 않았다. 이미 얼마 전에 맛보지 않았냐며 맛대가리도 없는 바나나를 왜 사 먹냐고 했다. 그 대신 아버지는 가성비도 좋고 맛도 좋은 귤을 한 봉지나 사주셨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스무 개 남짓 들었던 귤 한 봉지를 혼자 먹어치웠다. 다음 날 새벽, 눈물 젖은 귤은 입을 통해 그대로 다시 세상에 소환되었다. 먹을 때와 똑같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몸에 대한 예의라고 믿는 아내는 과일을 고를 때도 무척이나 신중했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귤'을 고를 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앉은자리에서 수박 한 통을 먹는다면 아내에게는 귤이 그랬다. 아내는 껍질이 얇고 크기는 적당히 작으며 새콤한 귤을 좋아했다. 신 과일이라면 질색하는 나는 무조건 달콤해야 좋았다. 아내가 마음에 드는 귤을 사 오면 "이번 귤은 좀 별로네." 하며 내가 멀리하고, 내가 좋아하는 귤을 사 오면 아내는 맛없다며 입에도 대지 않았다. 매사에 잘 맞는 우리 부부도 가끔 이렇게 엇나갈 때가 있다. 


 제주 한달살이를 할 때 서로 눈치 보지 않고 각자가 좋아하는 귤을 실컷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동네 앞 구멍가게, 마을 공판장, 향토오일장에서 구입하는 귤은 어디 하나 가릴 것 없이 한결같이 맛있었다. 5천 원에 검은 봉지 한 가득 담아주니 가격 부담도 없었다. 집에서 사 먹는 귤도 제주산(産)이긴 마찬가지일 텐데 이렇게나 차이 날까 싶었다. 아내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토불이(身土不二)'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마음에 쏙 드는 귤을 매일 먹을 수 있으니 아내는 연신 싱글벙글했다. 아내가 기분 좋으면 집안이 화평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명품백에도 흔들리지 않는 아내가 작은 귤 하나에도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다니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귤은 같은 품종이라도 재배 방식이나 수확 시기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를 만큼 또 하나의 신세계였다. '파치'라는 비상품용 귤은 감귤 생산 및 유통에 관한 조례에 따라 유통 및 판매가 금지되어 대부분 공짜로 나눠주는데 모양이 고르지 않을 뿐 오히려 맛은 더 좋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품종들 - 한라봉(청견과 폰캉 교배)부터 천혜향(오렌지와 감귤 교배), 레드향(한라봉과 감귤 교배), 황금향(한라봉과 천혜향 교배) 등 - 이외에도 처음 들어본 종이 더 많은 제주 향토 재래귤 유자, 동정귤, 진귤, 당유자, 청귤, 병귤, 빈귤, 지각, 사두감, 편귤, 감자, 홍귤까지 다양한 귤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궁금한 게 더 많아졌다. 

<왼쪽부터 감자, 사두감, 청귤 / 이미지 출처 : 서귀포 감귤 박물관>


 우리 역사에서 귤은 언제 처음 등장했을까?


 고려사에는 백제 문주왕 2년(476년) 탐라에서 방물(임금에게 바치던 그 고장의 산물)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8년(925년) 겨울에 '탐라에서 방물을 바쳤다', '토물을 바쳤다' 등의 기록이 남아 있지만 방물과 토물이 무엇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정황상 감귤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고려사 세가(高麗史 世家)에 따르면 문종 6년(1052년) '탐라에서 세공하는 귤자의 수량을 일백 포로 개정 결정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문종 이전부터 제주도에서 감귤이 정기적으로 공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원년(1392년)부터 제주도 귤유(橘柚)의 공물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감귤(柑橘)이라는 용어도 세조 원년(1456년)에 제주도 안무사에 내린 유지(세조실록 2권)에 등장한다. '감귤은 종묘에 제사 지내고 빈객을 접대함으로써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명확히 기록되었다. 이와 함께 감귤의 종류 간 우열, 제주 과원의 관리 실태와 공납 충족을 위한 민폐, 사설 과수원에 대한 권장 방안, 진상 방법의 개선 방안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역대 왕실은 이토록 중요한 감귤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과실세를 제정하는 동시에 관영 과원의 제도도 마련하였다. 과원과 상납 과실을 관장하기 위해서 중앙에 전담 관서를 두기도 했다. 지방 관영 과원은 관찰사와 수령 책임하에 관노비나 군졸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으나 때로는 성과가 부진했다. 이럴 때마다 관은 진상 물량을 충족시키기 위해 민폐를 끼치게 되었고 이는 민간 과수원의 발달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제주 3읍(제주, 정의, 대정)에 희귀한 감귤나무를 심고 장려하며 그 관리상태에 따라 상벌을 주었다. 예를 들어 노비가 당감자와 당유자 각 8주, 유감 20주, 동정귤 10주를 심으면 노비 신세를 면해 주었고, 일반 농가는 당감자와 당유자 각 5주, 유감과 동정귤 각 15주를 심으면 면포 30 필을 하사했다. 반대로 감귤나무를 심은 후 관리가 소홀하면 상으로 준 면포의 반환은 물론이고 노비로 환원하는 등 강경한 방침을 내렸다. 감귤재배가 관리들의 강요에 의한 노역인 데다 공납량의 증가와 지방관리들의 횡포까지 가중되어 백성에 끼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노역과 세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귤나무를 말라 죽이기까지 했을까? 조선시대 제주인들에게 귤나무는 새콤달콤 맛을 뽐내는 과일이 아니라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눈물 나무'였다. 민폐가 극에 달하고 차츰 재배 주수(땅 여덟 결을 한 단위로 공납을 책임지는 사람)도 감소하면서 고종 31년(1893년) 마침내 감귤의 진상 제도도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제주 한달살이를 위해 서귀포에 마련한 숙소는 작은 정원이 딸린 아담한 2층 집이었다. 2층 발코니에 서면 서귀포 앞바다가 훤히 보였다. 바다가 보이는 집이라니 뭍사람의 로망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아쉽게도 1층 테라스에서는 집과 건물에 가려 바다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아쉬움을 너른 귤밭이 달래주었다. 한적한 시골 동네였던 위미리에는 귤밭이 많았다. 규모가 큰 귤 농장도 제법 많았지만 집집마다 작은 마당에 귤나무가 몇 그루씩은 꼭 있었다. 아직 한 여름이라 노랗게 익은 귤은 볼 수 없었지만 평소 보지 못했던 파란 귤을 보는 것도 무척이나 신기했다. 입주하는 날 집주인 아주머니가 이 동네에서 재배되는 귤은 다른 지역보다 특히 새콤하고 맛도 좋다는 말을 해 주었을 때 설마 했는데, 미각이 극도로 발달한 아내와 둘째 아이가 몇 차례 맛을 본 후 정말 그렇다고 했다. 미각을 잃은 나로서는 느낄 수 없으니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만, 괜히 '지역 특산품'이 있는 것은 아닐 테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미세한 귤 맛의 차이를 짚어내는 아내와 둘째 아이의 섬세한 미각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코로나로 제주행을 포기하고 제주 앓이가 한창일 때 아내가 그린 작품이 <눈물 나무>다. 위미리 집 앞에 있던 귤밭을 떠올리며 그렸다. 노랗게 익은 귤이 주렁주렁 달린 귤나무를 보지 못했으니 절반은 상상에 의지했을 터였다. 귤이 탐스럽게 익어갈 때쯤 다시 제주에 오자고 약속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그 다짐도 지켜지지 못했다. 귤나무가 <눈물 나무>라고 불리게 된 사연은 '국립제주박물관'을 관람할 때 처음 들었다. 이제는 흔한 과일이 된 귤이지만, 조선시대 귤을 재배하던 제주인들은 그 귤 맛을 느껴 보기는 했을까 궁금했다. 제주로 이주하는 뭍사람이 부쩍 늘어나면서 이주민들이 제주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제주만의 독특한 '괸당 문화'를 꼽는다. 괸당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가깝게는 4.3 사건부터 조선시대의 감귤 진상, 고려시대 삼별초 항쟁까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 역사 속에서 제주인들은 수많은 고통을 받았다. 뭍사람을 배격하고 가까운 사람(친척이나 이웃)끼리 똘똘 뭉쳐야 겨우 버텨낼 수 있는 가혹한 시간이었다. 고통의 역사와 분리해서 제주 사람과 제주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제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왜 그들이 그토록 뭍사람을 밀어내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제주에 정착한 이주민들이 다시 육지로 돌아온다는 뉴스를 보았다. 제주로 들어온 사람보다 나간 사람이 처음으로 많다고 했다. 일자리 부족과 높은 물가와 집값(땅값) 상승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지난 20여 년간 50만 명 대를 유지하던 제주 인구가 지난해에는 67만 5천 명을 기록했다. 조금 주춤했던 제주살이와 이주 열풍이 코로나로 다시 살아나는 눈치다. 모순이 존재하는 제주, 어쩌면 진짜 현실이니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제주민도 이주민도 살아내야 할 각자의 삶이 있는 제주에서 누구도 눈물 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에 제주는 너무도 아름답고 눈부시지 않은가!


<눈물 나무 / 130 x 97 / 장지에 콜라주, 분채>


※ 본문에서 '감귤의 역사'는 서귀포 감귤 박문관 홈페이지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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