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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20. 2021

외면하고 싶은 역사와 마주하는 4·3 평화공원

가슴 아픈 제주의 현대사와 <순이 삼촌>

<4.3 평화공원  내 위령공원 전경>

 지난 4월 3일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제73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렸다. 故 노무현 대통령께서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 공식 사과한 이래로 문재인 대통령도 2018년, 2020년에 이어 올해까지 모두 세 번 추념식에 참석해 부당한 국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분들과 그 유족에게 위로를 전했다. 특히 '돔박꼿이 활짝 피엇수다(동백꽃이 활짝 피었습니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추념식에 처음으로 국방부 장관과 경찰청장이 함께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군경 최고 책임자가 정부에서 주관하는 4·3 공식 추념식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화해와 상생'에 이르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난하다. 올해 이렇게 한 걸음 내디뎠으니 완전한 용서를 구할 날이 언젠가 오지 않을까? 물론 용서는 사과하는 이가 아니라 받는 이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런데 제주 4·3 사건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가 2003년 발행한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라고 설명한다.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 약 2만 5천 ~ 3만 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에 해당한다. 희생자의 33%가 어린이, 여성, 노약자라는 점은 이 사건이 이념 대립을 넘어 부당한 국가 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낸다. 희생자의 86%가 군경 토벌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진압과정에서 군인 180명, 경찰 140명도 전사했다. 국가라는 이름 아래 목숨을 잃은 그들 또한 '국민'이었다.


 제주 한달살이를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다녀왔던 여러 장소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꼽으라고 하면 주저하지 않고 '제주 4.3 평화공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한국 현대사와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는 그곳에서 나도, 아이들도 4.3 사건의 진실과 처음으로 마주할 기회를 가졌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제주에 이토록 잔인하고 슬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고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제주 4.3 평화공원을 둘러본 후 "부끄러운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아야겠다."며 스스로에게 한 다짐은 여전히 유효할까? 제주의 아픔을, 나아가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아이들을 이끌겠다는 소망은 늘 푸른 상록수처럼 시들지 않으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제주 4.3 평화공원은 슬픈 역사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제주도민과 희생자를  위로하고 잔인하고 아픈 역사지만, 이를 통해서 화해와 평화의 길로 나아가자는 취지에서 탄생했다. 평화기념관은 역사를 기록한 공간으로 사건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 유가족 기록, 역사자료와 4.3 사건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48년 11명의 민간인이 토벌대에 의해 질식사한 다랑쉬 동굴을 재현해 두기도 했다. 발굴 당시 현장을 생생하게 재현해 피난살이의 처참함과 그마저도 용인하지 않았던 학살의 끔찍함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위령공원은 비설(희생자 변병생 모녀의 기념 조각), 위령탑, 귀천(4.3 당시 민간인들의 죽음의 이미지와 전래의 수의를 모티브로 한 조형물), 각명비(희생자의 성명, 성별, 당시 연령, 사망 일시 장소 등을 간결하게 기록한 비석), 위패봉안실(4.3 당시 희생된 희생자의 신위 14,120여 기가 봉안), 위령 광장, 행방불명인석(시신을 찾지 못해 묘가 없는 행방불명인을 대상으로 개인 표석을 설치해 넋을 추모하는 공간), 봉안관(2006년부터 2011년까지 발굴된 유해를 봉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령탑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늘어서 있는 각명비를 보면 누구나 말을 잃게 된다.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다. 10세 미만 피해자도 눈에 많이 띄었다. 깨어 있는 시민이 되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인간은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고 비극적인 역사는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깨어 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다.  

<결국 우리의 길은 상생, 즉 용서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4.3 평화공원에서 희생자를 추모하고 돌아오는 길에 작은 책방에 들러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을 한 권 샀다. 조천읍 북촌마을에서 발생한 비극이 순이 삼촌의 배경이다. 이틀 동안 무려 마을 주민 4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제주도 어디가 4·3을 비껴갈 수 있었을까 만은 이렇게 짧은 기간에 마을 주민이 집단 학살당한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당시 해안마을은 초토화 대상 지역이 아님에도 토벌대 군인 2명이 무장대에 살해되자 마을 주민에게 책임을 묻고 집단 학살했다. 북촌 초등학교에 마을 주민 1,000여 명을 집결시키고 군경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을 구분해 300명은 옹팡밭과 당팟 등에서 총살하고, 100명은 다음날 함덕 본부에서 학살했다. 주민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사람들이 불과 이틀 만에 희생당했다. <순이 삼촌>이 1978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현기영 작가는 모처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순이 삼촌> 역시 금서에 지정되었다. 4·3을 숨기고 왜곡하려는 독재정권의 노력은 30여 년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순이 삼촌은 소설의 형식을 빌린 것일 뿐 사실 그대로를 옮겨왔다. 그래서 몇몇 문장을 읽을 때는 숨이 막혔다.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70년도 넘은 비극이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4·3을 꼭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그 시간(자정)이면 이 집 저 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 집 저 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중략)
 아, 한날한시에 이 집 저 집에서 터져 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위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제주에 가면 꼭 먹어야 할 향토 음식, 꼭 가봐야 할 명소가 차고 넘친다. 우리 가족도 여행 목록을 만들어 우선순위를 정해두기 일쑤였다. 제주에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 4.3 평화공원에 가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물론 그곳에 가야 4.3 사건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적어도 그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하게 된다. 발을 내딛는 순간 공간에서 느껴지는 슬픔이 저절로 몸에 스며든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 제주에 가게 되면 4.3 평화공원에 꼭 한 번은 들러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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