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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22. 2021

제주의 천지창조 신화와 건국 신화

제주인의 삶에 녹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신화와 전설들 

 각 나라마다 천지창조 신화가 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반고(盤古)'라는 존재가 세상을 창조했다. 이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 우주는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은 하나의 덩어리였다. 빛도 소리도 없는 이 공간에서 반고가 태어났다. 반고는 커다란 도끼로 이 덩어리를 둘로 쪼갰다(손으로 밀었다고도 한다). 가벼운 쪽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었고 무거운 쪽은 내려가 땅이 되었다. 반고는 하루에 키가 1장(丈)씩 자라 하늘을 밀어냈고 그렇게 1만 8천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자 하늘은 점점 높아지고 땅은 두터워졌다. 반고가 죽자 몸의 각 부분이 해와 달, 별, 산, 강, 길, 논밭, 초목이 되었다. 러시아 남부의 넓은 초원지대에 살던 목축민은 스스로를 '고귀하다' 또는 '명예롭다'라는 의미의 '아리아인'으로 불렀다. 이들 역시 창조 신화를 가졌다. 이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 신성한 질서에 복종하던 신들은 세계를 일곱 단계에 따라 만들어냈다. 첫 단계에는 돌로 이루어진 크고 둥근 껍질 모양의 '하늘'을 창조했다. 다음 단계로 껍질 아랫부분에 모인 '물' 위에 평평한 접시처럼 자리 잡은 '땅'을 만들었다. 다음으로 땅의 중심에 '식물', '황소', '인간'을 창조했다. 마지막으로 '불'을 만들었다. 그리스 창조 신화에는 적대적인 두 힘 '카오스(혼도)''가이아(땅)'가 등장한다. 이들은 너무 적대적이라 함께 자식을 낳을 수 없어 각자 후손을 낳았다. 가이아는 천신 우라노스(하늘)를 낳고, 이어 바다, 강, 산, 언덕을 낳았다.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동침해 아들 여섯과 딸 여섯을 낳았다. 한편 카오스도 자식을 낳았다. '에레보스(땅속 깊은 어두운 장소)'와 '밤'이다. 밤은 다시 한 무리의 딸들을 낳는데 그들이 운명들(모이라이), 죽음의 영혼들(케레스), 분노의 신(에리니에스) 등이다. 천지 창조 신화는 당시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어 아리아인들은 세계는 '희생'에 의해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최초에 신들이 만든 세상은 작동하지 않았다. 식물, 황소, 인간이 스스로를 희생하자 드디어 세상이 움직였고, 각각의 주검에서 생명이 태동했다. 갑자기 닥친 암흑기를 보낸 그리스인들은 자비로운 창조주나 신성한 질서에 기댈 수 없었다. 세상에는 오직 증오와 갈등뿐이라고 믿었다. 오죽하면 아들(크로노스)이 아버지(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 쫓아냈을까! 그 아들 역시 자신의 아들(제우스)에게 내쫓김을 당했다. 


 우리나라에는 딱히 떠오르는 천지창조 신화가 없다. 가장 오래 거슬러 올라간 것이 고조선 건국 신화인 '단군 신화'다. 천지창조 신화가 없을 리 없을 텐데, 나만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의아했다. 우연히 우리나라의 천지창조 신화를 발견한 곳은 다름 아닌 제주도였다. 제주는 척박한 자연환경과 섬이라는 지리적 환경 탓에 민간 신앙이 깊숙이 뿌리내렸다. 1만 8천 신들의 고향이라는 별칭은 단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제주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제주인의 천지창조 신화는 '천지왕 본풀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주 신화는 주로 무속신앙을 통해 전승되기에 대부분 구전되므로 그 과정에서 생략되고 더해지기를 반복했다. 제주에서 신화를 '본풀이'라고 하는데 신의 탄생과 성장, 결혼과 출산, 공을 세운 이야기 등으로 구성된다. 천지왕 본풀이 역시 옥황상제 천지왕이 지상의 총명 부인과 혼인해 아들 둘을 낳고, 그 아들들(대별왕과 소별왕)이 이승과 저승을 다루게 된 사연을 다룬다. 이야기의 전반분에 천지창조 관련 내용이 언급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구분 없이 맞붙어 깜깜한 어둠 덩어리만이 있었다.
어느덧 때가 무르익어 천지개벽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늘 머리가 고개를 들고 땅의 기운이 다리를 내리면서 하늘과 땅 사이에
금이 생겼다. 그러자 하늘과 땅이 서서히 벌어지더니 시루떡 한 판 떼어내듯
딱 떨어져 나갔다. 그 사이로 산이 불끈불끈 솟아오르고 물이 쿨렁쿨렁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푸른 이슬이 내리고 땅으로는 검은 이슬이 솟아나 서로 합쳐지면서 세상 만물이 생겨났다. 사람과 짐승, 풀과 나무 등 온갖 생명이 고개를 내밀었다. (중략) 그러나 아직도 어둠은 계속되었다.
하늘에서 천황닭이 목을 빼 들고, 땅에서는 지황닭이 날개를 치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인황닭이 꼬리를 흔들며 크게 우니 동방에서 먼 동이 트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늘과 땅이 활짝 열리면서 천지개벽이 이루어졌다. 


 빅뱅 이론에 의하면 갓 태어난 우주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특이점이라고 부르는 엄청나게 뜨거운 일종의 용광로에 뭉쳐있었다. 이때 우주는 온도가 너무 높아 입자들이 모두 빠르게 움직이는 데다 밀도도 높아서 빛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끼워 맞추기식'이라는 논란을 면할 수 없겠으나 천지왕 본풀이에서 태초의 우주(세계)를 묘사한 부분과 빅뱅 이론은 은근히 닮았다. 물질과 에너지가 응축되어 빛조차 움직일 수 없는 우주를 본 적 없었을 옛 제주인들은 어떻게 우주를 깜깜한 어둠 덩어리에 비유했을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서양의 천지창조 신화보다 제주의 그것이 오늘날의 과학에 더 가깝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사실 천지왕 본풀이는 왜 우리가 사는 세상(이승)이 혼란스럽고 감당하기 힘든 고통들로 가득한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다. 이승을 다스릴 능력이 없는 소별왕이 욕심을 부려 이승을 다스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엣 제주인들은 그들이 겪는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이 바로 1만 8천 신들의 고향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신화와 전설을 낳게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전 세계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제주의 전설과 신화는 개별적으로만 존재할 뿐 하나의 이야기, 요즘식으로 말하면 '콘텐츠'가 되지 못했다. 웹툰 <신과 함께>에서 제주 신화를 일부 차용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물론 웹툰, 영화 모두 재미있게 보았다) 누가 쓰지 않는다면 언젠가 제주 신화를 제대로 공부해 멋진 판타지 소설을 써볼 계획이다. 물론 언제가 될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제주는 독자적인 건국 신화도 가졌다. 그렇다 옛 제주 '탐라'의 건국 신화다. 탐라가 언제 제주로 바뀌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부분 고려 숙종 때로 알려져 있다. 탐라는 백제, 통일신라와 조공관계를 유지하며 독립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다가 고려 때 이르러 지방행정구역의 하나인 탐라군이 되었다. 이후 고종 원년(1214년)에 제주군이 되어 탐라라는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참고로 '탐라'는 '섬나라'라는 의미의 소리글자이고, '제주(濟州)'는 바다 건너에 있는 고을(행정구역)을 의미한다. 


 삼성혈은 제주도 사람의 발상지로 고씨, 양씨, 부씨가 태어난 장소라는 전설이 담긴 유적지다. 친구들과 처음 제주에 왔을 때 둘러보고 이후 이십 년 넘게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고작 바닥에 난 구 멍 세 개가 제주 조상이 태어난 곳이라고?'라는 생각을 품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그럴듯하게 정비되어 있지도 않아 실망감이 더했다. 그러다 제주 한달살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우울한 날에 우연히 삼성혈을 다시 찾았다. 추적추적 구슬비도 내렸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여객선이 출항하기까지 한참 남았고 마침 가까이에 삼성혈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문재래시장에서 아쉬움을 달래며 이것저것 장을 봤는데도 시간이 남았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삼성혈은 한가해서 좋았다. 평일이었고 비가 와서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다. 인근 초등학교에서 견학을 왔는지 한 무리의 학생들이 있었지만 선생님 인솔 하에 조용히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이곳을 가득 채운 나무들에 놀랐다. 그냥 평범한 나무들이 아니었다. 수령 500년 이상의 고목들이 숲을 이루었는데 왠지 영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스산한 날씨도 한몫했다. 나무 사이를 걷는데 머리도 맑아지고 마음도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20대의 내가 느끼지 못했던 삶의 여백 같은 순간이었다. 아내도 무척 좋아했다. 제주를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주기에 이만한 장소는 없겠다 싶었다.  

<왕벚나무, 구실잣밤나무, 소나무 등이 짙은 숲을 이뤘다>

 별 거 없어 보였던 삼성혈도 이날만큼은 더 신비로워 보였다. 물론 아이들은 1분을 버티지 못하고 서로 장난치느라 정신없었지만 아내와 나는 돌담 옆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잔디 빛깔도 유난히 고왔다. 사람이 솟아 나온 세 개의 구멍은 비가 와도 고이지 않고 눈이 와도 쌓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이제 좀 실감 났다. 설문대 할망이 자취를 감춘 물장오리 밑이 삼성혈(모흥혈)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도 왠지 그럴듯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제주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는 시간이 제주인의 시초가 된 삼성혈이라니 묘한 인연이다 싶었다. 

 삼성혈 신화에 의하면 4300년 전 한라산의 신령한 화기가 모흥혈(옛 이름)에 삼신인을 솟아나게 했다. 뜻이 높아서 고(高)을나, 성품이 어질어서 양(良)을나, 능력이 뛰어나 부(夫)을라로 불렀는데, 이때 '을나(乙那)'는 왕 또는 두목을 의미한다. 수렵생활을 하던 삼신인은 오곡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벽랑국 삼공주와 혼인하면서 정착생활을 시작한다. 농경사회로 발전하면서 날로 백성이 많아지고 부유해져 마침내 탐라국을 건설하게 된다. 삼공주가 타고 온 자줏빛 함이 도착한 연혼포, 삼신인이 목욕한 연못인 혼인지, 신방을 꾸몄던 신방굴의 자취가 아직까지 성산읍 온평리에 남아 있다. 탐라의 건국 신화는 이렇게 매우 체계적이고 사실적이다. 1699년부터 삼을나의 위패가 봉안된 삼성전에서 봄(4월 10일)과 가을(10월 10일)에 후손들이 제사를 지낸다. 또 삼을나의 탐라개벽을 기려 1526년부터 매년 12월 10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삼성혈에 깃든 건국 신화는 제주인의 삶에 녹아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셈이다. 

 삼성혈을 마지막으로 제주를 떠났다. 한 달 정도 제주에 머물면 떠날 때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꼭 가보기로 마음먹었던 장소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다랑쉬 오름, 용눈이 오름, 새별 오름, 황우지 해변과 도리빨, 차귀도, 비자림, 수월봉 지질공원, 돌문화공원 등등 가보지 못해 가야 할 곳이 점점 늘어났다. 제주항을 출발하는 여객선 위에서 다음 봄에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1년 반이 훌쩍 지나갔다. 다음 제주 여행기를 쓸 때는 언급했던 곳들을 둘러보고 그 소회를 담게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 문헌>

 ♣ <축의 시대>, 카렌 암스트롱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제주편>, 유홍준 

 ♣ <제주의 파랑새>, 김정숙 

 ♣ <조근조근 제주신화1> 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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