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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20. 2021

다시 성산 일출봉에 오르고 싶다

때로는 가까이, 때로는 멀리서 마주하고픈 그리움이 있다

 성산 일출봉은 제주에 올 때마다 꼭 정상에 올랐던 우리 가족이 사랑하는 여행지였다. 제주에 왔다고 설문대 할망께 알리는 일종의 통과 의례였다. 천혜의 섬 제주, 아름답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든 제주에서도 특히 경관이 뛰어난 열 곳을 선정해 '영주십경'이라 부르고 첫 번째를 '성산의 해돋이' 꼽았으니 그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되었다. 그러나 한달살이 기간에는 성산을 한 번도 찾지 않았더랬다. 몇 해 전, 한 무리의 외국인 단체 관광객에 치여 발 디딜 틈도 없다는 말을 온몸으로 경험한 탓이었다. 어르신들 말을 흉내 내면 전쟁통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입구에서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덕분에 '광치기 해변'에서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성산 일출봉의 장관을 눈에 담기도 했지만, 오직 성산 정상에서만 볼 수 있는 99개의 봉우리가 만든 자연 성벽과 8만 평에 달하는 분화구 안 넓은 초원의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둘째 아이가 아직 아장아장 걷던 아가일 때, 첫째 아이는 등에 업고 둘째 아이는 가슴에 꼭 안아 끙끙 대며 오르던 성산 일출봉은 제주 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광치기 해변에서 본 성산 일출봉>

 성산 일출봉도 오름이다. 다른 오름들과는 달리 마그마가 물속에서 분출해 만들어진 수성화산체다. 화산활동 시 분출된 뜨거운 마그마가 바닷물과 만나면서 습기를 많이 머금은 화산재 층을 이루었고 이것이 쌓인 것인 성산 일출봉이다. 약 10만 년 전 생성 시에는 제주와 떨어진 섬이었다는데, 오랜 시간 동안 주변에 모래와 자갈 등이 쌓이면서 제주와 연결되었다. 성산 일출봉의 높이는 해발 182 미터, 둘레는 2,927 미터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원형에 가깝고 광치기 해변에서 보면 엎어 높은 사발 모양이다. 성산에도 아픈 역사가 잠들어 있다. 1943년 일본군이 이곳 해안절벽에 24개의 굴을 팠다. 수많은 제주민이 노역에 강제로 동원했다. 폭탄과 어뢰 등을 감춰두고 전쟁에 대비했지만, 사용하지도 못하고 일본은 패전했다. 제주 사람들의 피, 땀, 눈물이 서린 인공 굴들이 제주 곳곳에 생채기처럼 남아 있다. 또한 성산은 4.3 사건 당시 많은 민간인이 토벌대에 의해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발길 닿는 곳마다 넘쳐 나는 제주에도 슬픈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오늘의 제주와 제주 문화를 그 역사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한라산을 손수 빚었다는 설문대 할망 신화도 성산 일출봉과 인연이 깊다. 옥황상제에게 쫓겨나 제주로 귀향 온 설문대 할망은 여벌 옷이 없어 매일 길쌈을 했는데 성산 일출봉에 있는 기암괴석에 등잔불을 올려놓고 바느질을 했다. 처음에 바위에 등잔을 올려놓았는데 너무 낮아서 다시 바위 하나를 더 올렸다. 이 돌이 등경돌이다. 또 하루는 길쌈을 하다 오줌을 누웠는데 한 다리는 성산 일출봉에, 다른 다리는 오조리 식상봉에 디디고 앉았다. 그때 오줌 줄기에 섬 귀퉁이가 잘려 나갔는데 그때 만들어진 섬이 우도다. 제주는 육지와 멀리 떨어진 덕분에 설화나 민간신앙이 잘 보존되어 있다. 언젠가 제주의 다양한 신화와 전설을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로 꼭 한번 써 보고 싶다. 


 40여 분을 바지런히 걸어 올라간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성산 일출봉 정상의 풍경은 들인 품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 제주 바다와 성산이 내어주는 선물에 비하면 그 정도 품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역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산굼부리(분화구)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성산의 산굼부리 규모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예전 제주도민들은 이곳에서 말도 키우고 농사도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었다. 산굼부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뭍사람들에게 생소한 성산의 산굼부리 안에는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다. 인간이 닿지 않으니 자기들끼리 평화롭게 공존하리라. 대부분 관광객들은 전망대에서 사진 몇 장 찍고 금방 내려가지만, 그것으로 성산을 온전히 누렸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앞으로 쭉 펼쳐진 태평양을 바라보아도 좋고 뒤로 아기자기하게 솟은 오름들을 바라보아도 또한 좋다.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라 소섬이라 불리는 우도도 성산 정상에서 보아야 더 그럴듯하다. 아이들도 워낙 어렸을 때부터 자주 찾았던 곳이라 그런지 금방 내려가자고 보채지 않는다. 각자의 방식으로 제주의 자연을 즐긴다. 나는 굼부리 안 풀밭을 멍하니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그것만으로도 반쯤 빠져나간 생체 배터리가 충전되는 느낌이다.  


 성산 일출봉은 함덕 해수욕장, 협재 해수욕장과 함께 뭍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명소다. 사람이 몰리면 화폐가 몰린다. 상권이 형성되고 예쁜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선다. 제주 원주민인 지인들도 관광객이 많이 찾고, 부동산도 오르니 좋다는 이들이 있고, 갈수록 복잡해지고 섬이 더럽혀진다고 싫다는 이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제주 이곳저곳이 개발되고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는 것이 달갑지 만은 않다. 뭍사람의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제주를 지독하게 사랑해 제주에서 생을 마감한 사진작가 김영갑의 <이어도의 꿈>이 문득 떠올랐다. 이어도의 비밀을 잃어가고 있는 요즘, 안타까운 사람은 그저 몇몇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전히 이어도의 비밀을 잊는다면 그때는 우리 모두가 아파할지도 모른다. 아직 지킬 것이 남아 있을 때 꼭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단한 삶에 눌려 주저 앉는 대신,
이어도라는 꿈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더욱
충실하게 현재의 삶을 일궈나갔다. 그렇게 나는 그들이 누리는
평화로움의 비밀이 바로 이어도였음을 깨달았다.
관광산업이 제주 사람들의 생명산업이 되었다.
제주사람들은 이제는 이어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방목장으로 사용되던 드넓은 초원은 골프장으로 변하고,
아름다움이 빼어난 중산간 들녘은 리조트와 펜션으로, 별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제주사람들의 마음에서 이어도는 지워지고 있다.
이 땅에서 제주다움이 사라질수록, 제주인의 정체성을 잃어갈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어도의 비밀은 잊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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