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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20. 2021

비 오는 날에는 엉또폭포에 가야 한다

비 오는 날 제주에서 뭐하지?

 무사고 운전 경력 25년을 자랑한다. 작은 사고 한 번 낸 적 없다. 꾸불꾸불 험준한 강원도 산길에서 시작해 한 치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 강남의 무자비한 8차선에서도 살아남은 운전 실력이었다. 심지어 한 달간 미국 대륙의 구석구석을 직접 운전해 여행했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긴장하지 않는 능숙한 운전자라는 자부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이런 베테랑 운전자가 제주의 도로에서 차를 멈추고 운전을 포기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억세게 퍼붓는 비 때문이었다. 


 날씨 요정 아내 덕분에 제주에서의 짧은 여름휴가 중에는 좀처럼 큰비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아내는 제주 날씨가 1년 365일 항상 좋은 줄 착각했다. 제주에 사는 지인에게 날씨 이야기를 꺼내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 섬 날씨란 육지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라나…. 한달살이로 제주에 머무를 때는 아무리 날씨 요정이라고 해도 궂은비를 피할 수 없었다. 변덕스러운 섬 날씨 덕분에 언제나 플랜 B를 준비해야 했다. 그날도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렸다. 봄 꽃밭을 나풀나풀 춤추는 나비처럼 가벼운 빗방울이었다. 이 정도 비는 제주의 무더위를 식혀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수영복을 챙겨 바닷가로 향했다. 음악을 크게 켜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왕복하던 제1우회도로에 올라탔다. 그 순간 봄나비 같던 빗방울이 사나운 독수리가 되어 우리를 공격했다. 재빨리 비상등을 켜고 서행했다. 와이퍼를 제일 빠른 속도로 올려도 퍼붓는 빗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음악에 맞춰 신나게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도 어느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잠깐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치기는커녕 갈수록 더 심해졌다. 결국 안전을 위해 길가에 차를 세웠다. 계속 운전할 상황이 아니었다. 25년 운전 경력 중 비 때문에 차를 멈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10여 분 정도 서있으니 비가 좀 그쳤다. 신기하게도 우리 말고는 멈춘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제주도민은 이런 상황에도 익숙하구나 싶었다. 운전대를 꽉 움켜쥔 손을 놓으니 땀이 흥건했다. '아, 제주에서 운전 잘한다는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한없이 겸손해지는 순간이었다. 

 

 제주 날씨는 정말 뭍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는다. 미적분보다 어렵다. 아침에 '오늘의 날씨'를 확인할 때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 될 것이라고 분명히 예고했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온종일 비 소식이 있다고 하고서는 파란 하늘 위로 얄미운 태양이 힘자랑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제주 날씨에 대비하지 않으면 온전히 제주를 누릴 수 없다. 비가 내려도 제주에서는 즐길 수 있는 실내 활동이 많으니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맑은 하늘 아래서 올레길을 걷거나 오름을 오르고, 에메랄드빛 바다에 몸을 맡기는 쪽이 에너지 넘치는 우리 가족과 잘 어울렸다. 아침에 눈뜨면 날씨를 살피러 창가로 뛰어가는 습관이 생긴 이유다. 하지만 딱 한번 비가 오기를 학수고대한 날이 있었다. 평범한 비가 아니라 차를 멈춰 세울 만큼 큰비가 내리기를. 바로 엉또폭포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폭포(瀑布)의 사전적 의미가 '높고 곧은 절벽에서 곧장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라는데, 엉또폭포는 웬만큼 비가 오는 날에도 폭포수를 구경하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했다. 맑은 날에는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으니 폭포라고 부르는 게 맞나 싶기도 했다.   

<비 온 다음 날에도 폭포수를 보여주지 않았던 원망스러운 엉또폭포>

 엉또폭포라는 이름은 왠지 엉뚱한 듯 귀엽다. 자꾸 읊조리게 된다. 옛 제주인들이 이곳을 엉또라고 부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 방언으로 ‘엉’은 작은 바위나 작은 동굴을, ‘또(도)’는 입구를 뜻한다. '작은 동굴 입구'라는 의미다. 기암절벽과 조화를 이룬 천연 난대림의 비상한 풍경에서 유래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신비한 기운으로 가득한 이곳에 제주 민간 신앙에 등장하는 도깨비의 은신처와 이어진 동굴 하나쯤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듯했다. 시선이 닿는 순간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버리지만, 폭포라고 불리는 만큼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수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올레 7-1코스에 속해 있으니 누구나 엉또폭포에 갈 수 있지만, 폭포수를 만나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폭포수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우리 가족도 전날 밤 굵은 비가 쏟아져 잔뜩 기대하고 찾았는데 정말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누가 위에서 물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억지를 부리기까지 했다. 혹시나 해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역시나였다.

 인디언 기우제는 실패하지 않는단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폭포수를 꼭 보고 말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통했을까? 며칠 후 억수 같이 비가 퍼부었다. 야외 활동이 어려울 정도의 굵은 비였지만 서둘러 엉또폭포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50m 높이에서 쏟아지는 폭포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래로 아래로 끊임없이 내리꽂는 폭포수는 수량(水量)이 풍부해 시원하다 못해 살짝 두렵기까지 했다. 처음에 왔을 때는 도깨비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가 기암절벽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쏟아지는 폭포수 끝 어딘가에 비밀의 문이 있으려나 싶었다. 엉또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이야기가 자라는 곳, 역시 제주다웠다. 그동안 제주의 여러 폭포를 봐왔지만 수량만 두고 볼 때 엉또폭포가 최고라고 부를 만했다. 우비를 입은 아이들은 우산은 내게 맡기고 첫눈 만난 강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신나게 폭포를 즐겼다. 장대비를 뚫고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지난번 아쉽게 돌아섰던 마음이 비로소 풀렸다. 엉또폭포의 폭포수를 만나려면 비가 200mm 이상은 내려야 한다는데, 중요한 건 강수량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비가 내릴 때 폭포수를 만날 가능성이 컸다. 밀당의 고수 엉또폭포에 가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수를 보고 싶다면 시간당 강수량 확인은 기본이라는 점을 꼭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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