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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Nov 18. 2021

중간고사 끝나자마자 기말고사 준비하는 아들에게

아들에게 띄우는 편지 

그때 너의 성실함을 알아보아야 했다. 

맞아, 넌 그런 아이였지. 


아마 네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이었을 거야. 넌 한글나라 선생님께 한글을 배우고 있었지. 

초보 부모들이 누구나 그렇듯이 네가 처음 옹알이를 시작했을 때, 처음 엄마라고 입을 뗐을 때, 

처음 아~빠라고 힘겹게 말했을 때 우리는 네가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어, 혹시?  

천재가 아니면 적어도 영재인가 착각했지. 

환상은 오래가지 않았어. 그래, 넌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어. 

오해하지 마. 평범하다는 게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넌 존재만으로도 지독하게 사랑스러웠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어.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반반씩 닮은 너를 왜 이렇게 늦게 만났을까 엄청 후회했단다. 

그런 네가 한글을 배우면서 성실함을 보이기 시작했어. 

하루는 네가 숙제를 안 하고 깜빡 잠이든 거야. 

고맘 때 아이들이 다 그렇잖아.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너는 다음 날 새벽 6시에 홀로 잠에서 깨 숙제를 했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그 어린 네가 스스로.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두고두고 그날의 기억을 이야기했지.

맞아, 넌 그런 아이였어.

  

네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 

그날 너는 아빠랑 국어 문제를 풀었어. 

그때 아빠가 이야기했지. 

초등학교 시험은 지문과 문제에 답이 있다고. 

그것만 잘 읽으면 절대로 틀릴 일이 없다고. 

서술형 문제에 답을 쓰는 방법과 독후감 쓰는 방법도 그때 이야기해주었어. 

너는 어찌나 그 원칙을 잘 지키던지

학교 성적뿐만 아니라 각종 글짓기 대회에서 상도 많이 탔지. 

한 출판사에서 공모했던 '뒷 이야기 상상하기'에 당당하게 입상해서 해외 작가한테 편지(감상평)도 받았지. 

아들아 그거 아니?

그런데 그 방법은 초등학교 때만 통하는 거란다. 

너는 성실함으로 무장했으니

이제 중고등학교에서도 통하는 비법을 알려줄 때가 된 것 같다. 

기대해도 좋아. 


부모들은 가끔 학창 시절 성적을 부풀려서 이야기하곤 한단다. 

악의는 없어. 그냥 자식들이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선의의 거짓말'일뿐. 

그렇다고 네가 아빠, 엄마 성적을 의심하면 곤란해. 

우린 진짜 잘했거든!

하지만 너보다 성실했냐고 물어보면 절대 그렇다고 대답하지는 못할 것 같아. 

너는 중간고사 끝나고 바로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아이니까. 

과학에서 한 문제 틀렸지만, 틀릴 만한 문제였다며 기말에는 꼭 전 과목 만점을 받겠노라 다짐했지. 

그리곤 아직 기말고사 시험 범위가 나오지 않았다고 투덜거렸지. 

사실 아빠는 벼락치기 전문이었단다. 시험 전날 밤새 공부하고 시험이 끝나면 다시 백지장이 되었지.

암기 위주 주입식 교육의 희생자였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단다. 

그럼 한때 찬란했던 그 시절이 너무 슬퍼지잖아. 

너도 네가 어떤 색의 삶을 살든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지금을 즐기기를 바라. 

이 시간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단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냈을 때 쾌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지적 유희가

삶의 전부는 아니란다.  

계절의 순환을 몸으로 느끼고 때로는 지쳐 쓰러질 정도로 격한 운동도 해보는 거야.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란다.  

(엄마의 중요한 철학이기도 하고.)

 

너는 온종일 앉아서 공부를 하거나 공부 계획을 세우더라. 

아빠도 너만 할 때 계획 세우는 걸 무척 좋아했지만, 

너에 비하면 내 계획은 차라리 장난이라고 불러도 좋겠더라. 

엑셀 파일에 날짜별로, 시간대별로 빼곡하게 정리해 놓은 기말고사 준비 계획은 

한 꼼꼼했던 아빠가 보아도 입이 떡 벌어지더라. 

그런데 계획을 세우는 네 모습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그런 너를 보며 아빠도 절로 미소 짓게 되더라. 

아빠는 깨달았다. 

아, 이 아이는 정말로 공부하는 것이 즐거운 아이구나. 


아빠는 사춘기가 없었단다. 

중학교 3학년 때였던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크리스마스이브에 홀로 새 신발을 신고 명동 한 바퀴를 걷고 온 게 

내 인생 가장 큰 일탈이라면 일탈이었을까? 

그게 내 사춘기의 시작이자 끝이었지. 

네가 중간고사 끝나고 친구들이 함께 가자던 'OO역' 번화가에 가지 않는 대신,

'OO공원' 한 바퀴 걷고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빠는 깜짝 놀랐단다. 

그런 건 닮지 않아도 좋으련만…. 

어느 날 불청객처럼 사춘기가 찾아와 네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둬!"라고 말할까 봐 겁나기도 하지만, 

너 역시 사춘기 없이 그냥 철이 들어 버리면 어쩌나 걱정되기도 한단다. 

사춘기는 진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이니 

너무 과하지 않으면 경험한다고 나쁠 것도 없거든. 

혹시 어느 날 문득 사춘기가 찾아와도 

우리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말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만큼만 적당히.

부탁해. 


아들아, 흔히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잖아?  

아빠는 그 말에 절반만 동의한단다. 

때로 인생에는 질주가 필요한 시기가 있단다. 

정말 좋아하는 걸 미치도록 하는 열정이 필요한 순간이 있지. 

그런가 하면 게으른 베짱이가 되어야 할 때도 있어. 

어쩌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쉬어가야 할 때도 있지. 

마라톤은 늘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결승선을 향해 달리잖아? 

아빠가 살아보니 그런 삶은 조금 재미없더라. 

아들은 넘어지고 부대끼기도 하면서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살기를 바란다.  


May the Force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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