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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Nov 13. 2021

무로 돌아가리라!

한 해 농사의 마무리는 무와 함께

모처럼 날이 좋은 주말, 미루어 오던 일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한 해 농사의 마무리, 무 수확이었다. 

뜨거운 여름도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파랗고 빨갛게 달린 오이며 호박이며 토마토를 수확할 때 제법 그럴싸한 농사꾼 차림의 둘째 아이가 다음에는 무얼 심을 것인지 물었더랬다. 

가을 농사에는 무만 한 게 없었다. 한 평 남짓 텃밭에서 키우기에는 딱 좋았다. 

무를 심겠다고 하니 아이가 배추를 심잔다.  

자기는 무김치보다 배추김치가 좋단다.  

사실 지난해 무와 배추를 함께 심었는데 배추는 낭패를 보았다. 

배춧잎을 갉아먹는 벌레들 때문이었다. 

텃밭 4대 천왕 아주머니들은 배추 농사 제대로 지으려면 나무젓가락으로 벌레를 한 마리 한 마리 잡아야 한다고 했다. 잡아도 잡아도 배추벌레는 항상 나온다며 배추벌레 자연 발생설을 주장하셨다. 

기껏해야 서너 포기 정도 심는 게 전부고 텃밭에서 자란 배추로 김장을 담그는 것도 아니었다. 

벌레 먹은 배춧잎을 전부 잘라주면 겨우 주먹만 한 하얀 배추 속만 남았다. 

그래서 마음 편한 무가 좋았다. 땅속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던 것을 뽑아주기만 하면 됐다.  

인공 조미료를 쓰지 않는 아내가 육수 낼 때 무도 함께 넣어서 쓸모가 많았다. 

그늘에 잘 말린 무청으로 우리 모두 좋아하는 시래깃국도 만들 수 있으니 더 좋았다. 

이런 사정을 설명하며 아이에게 무를 심자고 했더니,

그럼 우리 텃밭에 있던 배추벌레들은 배고파서 어떻게 하냐고 아이가 물었다. 

아마 우리 텃밭에 배추가 없는 걸 알면 다른 텃밭으로 알아서 찾아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무를 심고 한 달쯤 지났을까, 생각보다 무가 잘 자라지 않았다. 

텃밭 4대 천왕 중 한 분께 물었더니 질소 비료를 주었냐고 한다. 

무가 쑥쑥 자라는 데 질소 비료만 한 게 없다고 하셨다. 

그날 저녁 아내한테 무가 잘 자라려면 질소 비료를 주어야 하는데 어떻게 할지 물었다. 

지난여름에도 사용하지 않은 질소 비료를 무한테 꼭 줄 필요가 있는 건지 내게 물었다. 

농사를 업(業)으로 삼지 않고 수확량이 생계와 직결되지 않으니 환경에 부담 가는 질소 비료를 사용하지 않았다.

집에서 먹는 무인데 비료까지 줄 거 무엇 있냐고 현명한 아내가 말했다. 

그러자고 했다. 

무는 쑥쑥 자라지 않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한 평 텃밭에 심은 무라 얼마 되지 않으니 수확은 금방 끝났다. 

무청을 자르고 흙이 뭍은 무를 깨끗하게 씻는 동안 둘째 아이는 혼자 텃밭을 정리했다. 

뭘 그리 열심히 하냐고 했더니 내년 농사를 준비한단다. 

그건 겨울의 끝자락에서 해도 충분하다고 했더니 미리미리 해둔다고 나쁠 것도 없단다. 

그랬다. 

다른 건 매일 '미리미리'하라고 하면서….

수확을 끝내고 내려오는 길에 아이가 잠깐 기다리라며 그네를 탔다. 

밀어주어야 겨우 타던 그네를 이제는 혼자서도 얼마나 잘 타는지 모른다. 

서너 번만 밀어주어도 숨이 넘어갈 듯 까르륵까르륵 웃던 아기였는데 세월 참 빠르다. 

그네 옆에 앉아 아이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우리 텃밭에 살던 배추벌레는 굶지 않고 다른 텃밭으로 잘 이사했을까? 

주먹보다 작은 무를 본 아내는 결국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함박웃음과 함께 올해 농사는 막을 내렸다. 

아직 겨울이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새봄이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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