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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Nov 25. 2021

이 나이에 수능 문제 푸는 이유 (에필로그)

언어 영역 문제를 다 풀었다!

 아내 성화에 2022학년도 대학 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 양대 산맥 국어와 영어 영역을 결국 다 풀게 되었다. 아내는 기왕 한국사와 영어 듣기 평가를 아이와 함께 치렀으니 국어와 영어 나머지 문제도 풀고 아이들 선생님으로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라며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수능 국어는 독서를 좋아하는 나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라도 매해 풀었으니 이번에도 조용히 혼자 풀어볼 계획이었다. 영어는 서바이벌 잉글리시로 풀 수 있는 수준이 아님은 분명했다. 솔직히 듣기 평가는 운이 좋았다 싶었다. 아이 앞에서 멋진 대사 한번 날렸으니 충분했다. 괜한 욕심부렸다가 망신당할 수 있어 아내의 따가운 눈총을 애써 외면했더랬다. 아내는 점수가 좋지 않으면 아이한테 보여주지 않으면 그만이니 시키는 대로 하라며 최후통첩을 내렸다. 상명하복(上命下服), 더는 우리 집 절대 존엄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우리 집에는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는 대신, 그렇다고 전혀 보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국어 독해 문제와 수학 연산 문제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풀어야 하는 소위 '아빠 숙제'가 존재한다. 이제 공부라면 혼자서도 잘하는 첫째 아이도, 공부 빼고는 다 잘하는 둘째 아이도 예외가 없다. 시간 날 때마다 아이들이 빼놓지 않고 문제집을 푸는지 확인하고 틀린 문제나 모르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이 아빠 몫이다. 아내가 '선생님'으로 부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독서를 생활화하면 '평생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라 믿기에 기꺼이 아이들 선생님, 특히 국어 선생님을 자처했다. 새해가 되면 아이들과 함께 서점에 가서 문제집을 고르고, 방학이 되면 읽어야 할 책 목록을 작성해 제공하기도 했다. 가능하면 글쓰기(한 줄 감상, 독후감, 마인드 맵 작성 등)도 연계하려고 노력했다. 내 업(業)이니 수능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총 45문항이 출제되는 국어 영역은 34번까지는 문·이과 통합 문제를 풀고 35번부터 45번까지는 '화법과 작문'을 선택했다. 지난 두 해 동안 화법(작문) 문제는 거의 틀리지 않았고, '언어와 매체'에는 가장 많이 틀리는 문법 문제가 포함돼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45문항을 다 풀었다는 게 중요하니 좀 더 쉬운 길을 택하기로 했다. 화법과 작문을 택한 건 신의 한 수였다. 다행히 후반부에서는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문제는 전반부였다. 이번 국어 영역이 '불수능'이라고 불렸던 이유는 4~9번 '헤겔의 변증법' 관련 문제, 10~13번 '브레턴우즈 체제' 관련 문제 때문이었다. 솔직히 지문을 천천히 두 번이나 읽었는데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14~17번 '자동차 360˚ 영상 제공 관련 문제도 무척 어려웠다. 헤겔의 변증법 관련 문제를 풀 때는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지?" 현타가 오기도 했다. 브레턴 우즈 체제?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낯선 단어였다. 처음 보는 지문에 오래전 배웠던 개념들이라 심적 부담이 컸는지 잠깐 시험지가 하얗게 보였다. 정신 차리고 어찌어찌 풀었는데 지문 당 한 문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둘이나 셋 중 하나는 정답이 분명한데 어느 하나 선택할 수 없는 기분,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수험생의 고뇌'였다. 그렇다고 찍어서 맞히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풀지 않고 그냥 두려다가 초반부터 두 문제나 풀지 않으면 결과가 어떨지 불 보듯 뻔해 절반 정도는 운에 맡기기로 하고 답을 골랐다. 독서를 생활화하는, 가끔 수준 높은 책도 기꺼이 읽는, 어른도 이토록 어려운데 수험생들이 잘 풀었을지 궁금했다. 최근에 읽은 <EBS 당신의 문해력>에 의하면 우리나라 아이들이 다른 나라 아이들에 비해 문해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지적했는데, 대학 수학능력 평가에서 이 정도 고난도 문제를 출제한다면 문해력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물론 관건은 얼마나 많은 학생이 정답을 찾아내는가이겠지만 그건 논외로 하고)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자동차 영상 제공 관련 지문은 국어 문제라기보다 과학 문제에 가까웠다. 전형적인 문과형 인간인 내게 우리말이 우리말처럼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이토록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한다니 정말 요즘 학생들 대단하다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국어 영역 문제를 다 풀고 채점해 보니 의외로 쉽다고 생각한 문제는 틀리고, 어려운 문제는 대부분 맞힌 꼴이 되었다. 점수는 아이에게 패기를 보여주며 "봤지? 평소에 책 읽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대사를 날릴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휴, 얼마나 다행인지 애써 공들인 게 물거품이 되지는 않았다. 아빠가 푼 수능 국어 영역 문제지를 건네주자 점수를 확인한 아이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Respect'의 눈빛도 약 5g 정도 녹아 있었다. 그 순간 영어 영역 문제지도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아이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물었다. "실화야, 레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영어 시험지 맨 앞 장에 점수가 떡 하니 쓰여 있는데…. 


 마찬가지로 총 45문항 출제되는 영어 영역은 17번까지 듣기 평가라 18번부터 45번까지만 새로 풀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영어 문제를 푸는데 영어가 아니라 국어 시험을 보는 느낌이었다. 특히 어려운 지문일수록 영어를 단순히 우리말로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용을 파악하고 논리적 사고를 더해 기존 지식을 활용해야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수준 높은 문해력을 요구했다. 물론 해석만으로 풀 수 있는 비교적 쉬운 문제도 종종 눈에 띄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견해로는, 해석만으로 풀 수 없는 문제가 많았다. 채점이 끝난 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는 유튜브에 올라온 기출문제 해석을 찾아 듣기까지 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영상 대부분이 '해석(독해)'에만 초점을 맞춰 설명해 준다는 점이었다. 독해만으로 해당 문제를 틀리거나 어려워한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다. 솔직히 내가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결국 영어 영역에서도 문해력이 필수였고, 문해력은 평소 독서활동을 통해서 길러야 한다는 다소 '뻔한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EBS 당신의 문해력>에서는 공교육이 아이들 문해력 향상을 책임져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지에는 회의적이다. 우리 교육 제도는 '기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국어 영역 첫 번째 지문을 '독서' 관련 문제로 출제했다는 것에 감사할 뿐. 힘들더라도 아빠가 두 팔 걷어붙이고 독서를 습관화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언어 영역 점수를 본 아이는 내년 수능에 도전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수학은 한 문제도 못 풀겠더라 했더니 고개를 심하게 끄덕인다. 화제를 전환할 겸 재빨리 언제 아빠랑 국어와 영어 영역 풀어볼래 물었더니 아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기말고사 끝나고!" 그랬다. 이 아이는 중간고사 끝나자마자 기말고사 준비하는 아이였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일도 아닌데 수능 문제 풀이에 시간을 뺏길 아이가 아니었다. 뭐야, 그럼 나 괜히 푼 거야?



 가끔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손에 책을 쥔 사람을 여간해서 찾기 힘들다. 그러다 가끔 한두 사람 만나면 괜히 다가가 말 걸고 싶다. "독서 좋아하세요? 저도 좋아해요." 아직은 우리 곁에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책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책은 과거와 현재의 지식과 지혜를 담아 놓은 하나의 그릇에 불과하다. 그릇의 종류는 다양하다. 다만 책이라는 그릇을 깨뜨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저 가끔 만나는 중학교 동창생처럼 연(緣)을 이어나가면 좋겠다. "책을 불태우는 것보다 더 질이 나쁜 행동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화씨 451>의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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