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올바른 독서 습관을 길러 주기 위해서
2009년 개봉한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주인공 자말은 거액의 상금이 걸린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퀴즈 쇼에 나가 우승한다. 빈민가 출신에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가 그토록 어렵다는 퀴즈 쇼에서 우승할 수 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자말이 살아온 모든 순간이 퀴즈 쇼에 출제된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단서가 되었다. 인생에 딱 한 번 신이 머물렀다 가는 순간, 누군가는 이를 두고 기적이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불수능이었던 2022학년도 대학 수학능력시험에서 공교롭게도 언어 영역 두 과목(국어 영역, 영어 영역)에서 모두 제법 높은 점수를 받았다. 문제 초반부터 불맛에 호되게 당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마음을 다잡고 침착하게 지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런대로 풀만했는지 80점 정도는 맞으리라 은근히 기대했더랬다. 채점을 끝내고 두 과목 모두 90점이라는 점수에 스스로도 좀 놀랐다. 아니, 많이 놀랐다.
처음에는 운이 좋았다고 믿었다. 긴가민가한 문제들이 여럿 있었고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했다. 그렇다, 찍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찍을 경우 전문용어로 '반타작'이라도 하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그 이상이었다. 하필 이 시점에 왜 그랬을까? 운이 아니라 '운명'이었던 걸까?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주인공 자말처럼?
비트코인 광풍이 불기 직전, 많은 사람이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며 묻지 마 투자에 나설 때 서점으로 달려가 '암호화 화폐'와 관련된 두 권의 책을 사서 읽었다. 메타버스가 도대체 어디 가는 버스인데 연일 뉴스를 장식할까 궁금해 도서관에 달려가 '메타버스' 관련 책을 빌려 읽었더랬다. 일본 정치인들은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 걸 알면서 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까 궁금해 도서관으로 서점으로 달려가 관련 책을 살폈다.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 기후위기, 문해력이 궁금할 때도 비슷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책부터 찾아 읽었다.
TV가 한 자리 차지해야 할 거실 한 편에 TV 대신 책장을 두었다. 한 번도 내 방이 없었던 어린 시절 꿈이었다. 거기에는 유시민 작가 책을 비롯해서 최장집 교수, 조국 교수, 정재승 교수, 유발 하라리, 한스 로슬링, 칼 세이건, 리처드 도킨스, 제임스 러브록, 아담 스미스, 마키아벨리, 막스 베버, 빌 게이츠, 클라우스 슈밥 등 내로라하는 저서들이 즐비하게 꽂혀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파울로 코엘료, 움베르트 에코, 베르나르 베르베르, 조정래, 김훈, 박완서, 이외수 등 좋아하는 소설가 역시 한 자리씩 차지했다. 마케팅 관련 서적은 30권, 글쓰기 관련 서적은 20권 넘게 있다. 제주의 신화와 역사, 음식과 문화에 대한 책도 10권은 족히 넘는다.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고전이라 부를만한 책들도 수십 권 넘게 있다. 물론 책장에 꽂힌 500권 이상의 책들을 대부분 읽었다. 몇 번 시도해도 읽지 못한 어려운 책들(예를 들어 '만들어진 신'이나 '생각의 탄생' 같은)을 제외하고는.
독서하는 습관은 제각각일 테지만, 내 경우 형광펜이나 색연필로 줄 치며 읽는 걸 좋아한다. 소설의 경우,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나중에 글쓰기에 도움이 될만한 좋은 문장은 필사를 해둔다. 도서관에서 빌려 와 줄 치며 읽을 수 없는 책들도 가끔 필사했다. 머리가 썩 좋지 않아 '내가 이 책을 읽었던가?' 할 때가 많다. 책장을 펼쳐 밑줄 친 문장이나 메모가 눈에 띄면 '아, 맞다. 이런 내용이었지.' 하고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막 독서를 끝내면 그 책 내용이 온전히 머리에 남지만, 망각이라는 신의 축복을 받은 우리 인간은 많은 걸 기억하고, 또 많은 걸 잊기 마련이다. 그럴 때를 대비해 밑줄 정도 쳐두는 게 좋겠다 싶어 어린 시절부터 줄 치며 책을 읽었다. 필사는 글쓰기와 함께 최근에 시작했다. 필사한 문장을 가만히 읽으면 내가 왜 이 문장을 따라 썼는지, 작가는 왜 저렇게가 아니고 이렇게 썼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자연스럽게 독후 활동이 되는 것이다. 읽기에 그치지 말고 어떤 행태로든 독후 활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필기하는 걸 좋아했고, 제법 잘했다. 시험 기간이 되면 친구들, 후배들이 내 노트를 복사하려고 줄을 설 정도였다. (기억은 과장되기 쉬우나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요즘도 공부(정보 습득)를 위해 읽는 책은 종종 필기(메모)를 해둔다. '그걸 꺼내보기나 하겠어?'라고 물어보면 사실 대답할 말이 없다. 그렇다. 꺼내 볼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굳이 메모하는 이유는 읽은 내용을 정리해 두면 상기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고미숙 작가 이야기처럼 읽기와 쓰기는 원래부터 하나가 아니던가.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한 궁극의 단계는 읽은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언어로 설명(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끔 책에서 읽은 내용을 일부러라도 아이들이나 아내에게 말하는 건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내가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30여 년 동안 지켜온 이런 습관이 불수능에서 괜찮은 점수를 받은 비결이라 믿었다. 덕분에 아이들에게도 '평소에 꾸준히 독서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지?'라며 한 마디 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은 이미 이전 글에서 하지 않았냐며 아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100점 받은 것도 아니고 딸랑 90점 받은 걸로 몇 번을 자랑하나며 힐난했다. 억울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뭐, 어찌 보면 비슷하지만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도 그랬지만 지금 고등학생들은 정말 독서할 시간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간에 쫓기는 직업이 고등학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이들은 참 바쁘다. 해야 할 공부도, 채워야 할 빈칸도 무척이나 많다. 내가 학력고사를 치르던 30년 전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대학 수학능력시험 언어 영역에서 수험생에게 요구하는 능력은 30년 넘게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독서 활동을 해온 성인조차 어려운, 찍어서 맞혀야 할 문제 투성이다. 수능 족집게 강사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매웠다. 사고의 수준이 '수학-학문을 배움(학업을 닦음)' 능력을 훨씬 초과했다. 아무리 현행 입시 제도가 수험생을 '줄 세우는' 데 목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온전히 책 한 권 읽고 독후 활동할 여건조차 마련해 주지 못하는 학습 환경에서 이토록 매운맛으로 아이들을 몰아붙이는 것이 마땅한지 의구심이 들었다. 사실 이런 문제는 마땅한 대안과 함께 제기해야 하지만, 나 역시 뾰족한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 관련 책을 찾아 공부 좀 해두어야겠다.
큰 아이가 곧 중3이 된다. 책 읽기에 온전히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건 내년 1년밖에 없다. 고등학생이 되면 아무리 내 아이지만 독서하라고 채근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2022년은 여러 모로 아이 독서 인생에 중요한 해로 기록될 것 같다. 그런 아이에게 올바른 독서 습관, 기왕이면 수학능력시험에서도 도움이 될만한 독서 습관을 길러주어야 하지 않을까? 요란한 말만 앞세우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본보기가 필요했다. 도깨비의 '불의 검'이 900년이 지난 지금, 간신 '박충원'을 베기 위해 필요했던 것처럼.
중간고사 끝나자마자 기말고사를 준비하던 큰 아이는 이번에도 좋은 성적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아이도 기말고사 끝나자마자 아빠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시험을 준비하는 한 달 반 동안 읽기로 약속했던 책을 손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잔소리 끝에 다가올 겨울방학과 중3 한 해를 제대로 된 독서 습관을 기르는 데 오롯이 집중하기로 했다. 문해력 역시 근육처럼 노력으로 충분히 강하게 만들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아이에게 요청한 건 아래 세 가지였다.
1) 작가와 작품에 대한 배경 지식 메모하기
2) 책 읽고 느낀 점 쓰기
3)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나 좋아하는 문장 필사하기
책 읽기에서 끝나면 그 순간뿐이다. 반드시 독후 활동이 뒤따라야 한다. 이런 독후 활동 때문에 아이들이 독서를 숙제로 생각해 멀어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다행히 큰 아이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걸 잘 알았다. 잘 따라줄 테지만 '재미' 있는 요소와 결합해 지치지 않고 독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한다. 그중 하나가 '가족 독서 모임'이다. 지난해 겨울방학부터 계획했지만 실행하지는 못했는데, 어떤 브런치 작가님 글을 보고 이번에는 기필코 해내리라 다짐했다. 순서를 정해 '독서 퀴즈'를 내는 것도 재미있게 독서할 수 있는 방법이다. 결국 내 운명은 아이에게 평생 써먹을 수 있는 독서 습관을 길러주는 거였다.
예전에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그 생각이 좀 바뀌었다. 한 권을 읽어도 깊게 읽는 게 좋았다. 그 안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다른 책이나 자료를 찾아보는 식으로 확장해 나가는 편이 훨씬 도움되었다. 이는 독서 활동과 독후 활동이 완전히 통합되는 단계로 장주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주인지 모르는 단계와도 같다. (꿈보다 해몽...) 이렇게 구구절절이 써놓고 보니 독서가 정말 일처럼, 공부처럼 보인다. 절대 그렇지 않다. 내게 책 읽기는 정말 넷플릭스보다 스마트폰 게임보다 훨씬 재미있다. 재미있으니 신나게 할 뿐이다. 아이들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