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2일, 부모로서 아이에게 해 줄 세 가지
이번 설 연휴에 부모님 뵈러 갔다가 오랜만에 큰누나네 집에 들렀다. 큰 매형과 큰누나한테 세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새해 인사라도 드릴 요량이었다. (어릴 때는 세배해서 제법 용돈을 챙겼다) 큰누나는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을 자식처럼 귀히 여겼다. 장사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친 엄마를 대신해 어린 남동생을 업어 키우다시피 했다. 한창 친구들과 수다 떨며 놀 나이에 동생 똥 기저귀를 빨고 삼시 세끼 끼니를 꼬박 챙겨 먹였다. 그런 큰누나는 내게 엄마와도 같은 존재였다. 큰누나는 사회에 나가서 피땀 흘려 번 돈을 동생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아버지 박봉으로 채울 수 없는 빈자리를 누나의 고단함으로 메웠다. 특히 막내인 내게 용돈이며 새 옷, 새 신발을 챙겨주는 건 언제나 큰누나 몫이었다. 고운 외모와 달리 여장부 스타일이던 큰누나는 하던 장사가 잘돼자 동생들까지 끌어들여 밥벌이를 책임졌다. 학생이었던 나는 큰누나 덕분에 당시로서는 고급 스포츠였던 볼링이나 스키에도 입문했다. 나이키 운동화도 누나가 사줘 처음 신어 보았다. 큰누나의 사랑과 보살핌을 듬뿍 받은 나는 '내리사랑'이라고 조카들에게 잘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이제 조카들이 자라 성인이 되어 사회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내리사랑은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로 유유히 흐르고 있다.
큰누나와 이런저런 훈훈한 이야기를 나누다 '어머니 책' 만들기에 이어 '아버지 책' 만들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마감 기한이 훌쩍 지났는데 글 써서 보낸 사람이 달랑 두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엄살을 부렸다. 그런데 갑자기 큰누나가 정색하며 아버지에 관한 글을 자신은 절대 쓰지 않겠다며 딱 잘라 말하는 게 아닌가! 동생에게 한없이 베풀기만 하던 누나에게서 그간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함이 느껴졌다. 너무 놀라 이유를 묻자 큰누나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이 없다는 다소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다. 어머니에 관한 글을 쓰자고 할 때 '이 나이에 무슨 글을 써?'라고 불평했지만 결국 동생들을 펑펑 울게 만든 진심을 담은 글을 내놓았던 큰누나였다. 그런 누나가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이 없어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하다니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큰누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5녀 1남, 우리 여섯 명의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을까 더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내게 칭찬도 꾸중도 하지 않으셨다. 공부하라는 잔소리조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내가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칭찬은 아낄 수 있어도 꾸중이나 잔소리는 참기 어려웠다. 두 녀석이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하루라도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칠 지경이었다. 돌보지 않으므로 돌봄을 택했던 아버지가 새삼 존경스러웠다. 그런 아버지도 어린 나를 데리고 강으로 냇가로 투망질을 자주 다니셨다. 장난감이 없던 유년 시절 아버지와 함께 다녔던 강가는 최고의 놀이터였다. 수영복이 없어 팬티 한 장 달랑 걸치고 물놀이를 즐겼지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부끄럽기는커녕 자연 속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경험은 황홀함에 가까웠다. 아버지와의 추억 덕분에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 아이들과 여행이나 캠핑을 가려고 노력했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아이들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보면 좋겠다 싶었다.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라 믿었다. 결국 아버지는 큰누나에게 만들어 주지 못했던 유년의 행복한 추억을 나에게만 한껏 쌓아 주셨다. 집안 형편이 점차 나아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역설적으로 거기에는 누나들의 경제력도 한몫했다. (큰누나는 아버지께 생애 첫 자동차를 선물했다) 이유야 어쨌든 아버지는 내게 좋은 영향(일부는 반면교사로서)을 끼쳤고 적어도 나는 아버지에 대해 기억하고 글쓰기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아이들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고, 해마다 찍은 사진으로 달력과 성장 앨범을 만들어 주는 내 모습이 직장 동료나 친구들에게 조금 유별나게 비친 듯싶다. 가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노하우를 묻곤 했다. 딱히 노하우라고 할 것 까지도 없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고, 듣는 사람이, 재수 없는 대답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아내 몰래 모아둔 비상금으로 골프 용품을 살까, 캠핑 용품을 살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마음은 이미 캠핑 용품으로 기울었지만, 몇몇 선배들이 '직장 생활 잘하려면 골프는 필수야.' 하며 강권했기 때문이다. 오랜 고민 끝에 캠핑 용품을 사기로 결심했다. 역시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가족이었다. 그때 장만한 캠핑 장비들로 아이들과 행복한 추억을 한바탕 쌓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최종 단계, 게임으로 치면 만렙에 해당하는 내려놓기를 실천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자 마침(또) 운명처럼 박노해 시인의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라는 작품을 만났다. 누군가에게는 빌런이고 누군가에게는 히어로였던 아버지가 나에게 해 준 것들과 묘하게 겹쳤다. 아버지가 의도하셨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아버지께 배운 삶의 지혜였다. 게다가 내가 말로써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던 '내려놓음'을 이 시가 온전히 대신 설명해 주었다. 미세 먼지로 온통 희뿌연 하늘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파란색으로 보이는 명징함이었다. 비로소 머리가 맑아졌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우리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해 줘야 하는 일들이. 노하우를 물어보는 친구들에게 대답해 줄 수 있는 말이.
무기 감옥에서 살아 나올 때
이번 생애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혁명가로서 철저하고 강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허약하고 결함이 많아서이다
하지만 기나긴 감옥 독방에서
나는 너무 아이를 갖고 싶어서
수많은 상상과 계획을 세우곤 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일체의 요구와
그 어떤 교육도 하지 않기로 했다
미래에서 온 내 아이 안에는 이미
그 모든 씨앗들이 심겨져 있을 것이기에
내가 부모로서 해줄 것은 단 세 가지였다.
첫째는 내 아이가 자연의 대지를 딛고
동무들과 마음껏 뛰놀고 맘껏 잠자고 맘껏 해보며
그 속에서 고유한 자기 개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기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
둘째는 '안 되는 건 안 된다'를 새겨주는 일이다
살생을 해서는 안 되고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 되고
물자를 낭비해서는 안 되고
거짓에 침묵 동조해서는 안 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 는 것을
뼛속 깊이 새겨주는 일이다
셋째는 평생 가는 좋은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자기 앞가림을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습관과
채식 위주로 뭐든 잘 먹고 많이 걷는 몸 생활과
늘 정돈된 몸가짐으로 예의를 지키는 습관과
아름다움을 가려보고 감동할 줄 아는 능력과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홀로 고요히 머무는 습관과
우애와 환대로 많이 웃는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그러니 내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은
내가 먼저 잘 사는 것, 내 삶을 똑바로 사는 것이었다
유일한 자신의 삶조차 자기답게 살아가지 못한 자가
미래에서 온 아이의 삶을 함부로 손대려 하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월권행위이기에
나는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자 안달하기보다
먼저 한 사람의 좋은 벗이 되고
닮고 싶은 인생의 선배가 되고
행여 내가 후진 존재가 되지 않도록
아이에게 끊임없이 배워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저 내 아이를
'믿음의 침묵'으로 지켜보면서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