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수업
유아기억상실증(Infantile Amnesia) 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 3세 이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가끔 본인 돌잔치에서 뭘 집었는지 기억한다는 사람이 있는데 거짓말이 아니라면 정말 기억력 하나는 세계, 아니 우주 최고라 할만하다. 기억을 주관하는 해마 (Hippocampus)에서 뉴런 (신경세포)이 증식하면서 기존의 기억들이 삭제되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없어진다고 한다. 누군가가 농담처럼 해외여행 같은 경험은 절대로 다섯 살 이전에는 해 주지 말라고, 아예 초등학교 들어간 이후부터 해주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그냥 흘려들을 말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은 어떻게 기억되는 것일까?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그 순간이 세상에 처음 접속한 순간임을 인지하게 해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무섭던 순간, 아니면 그냥 평범한 어떤 한 순간일까? 온통 뿌연 안갯속 같은 길을 걷다가 갑자기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원래부터 무(無)였을 것 같은 시간의 정지(停止) 속에서 어떤 섬광 하나가 일어 나를 세상에 접속해 주었을까?
3세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애써 기억하는 것 보다도 나는 이것이 더 궁금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세상에 처음으로 접속하게 된 것일까?
내 기억에 세상과 최초로 접속한 순간은 네 살 때이다. 그 날은 우리 집이 이사하는 날이었다. 내 기억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세 명이다. 엄마와 나, 그리고 누나들 중 한 명이다. (몇 번째 누나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 당시에 우리는 소양로 1가에 살았는데 소양로 2가로 이사를 가는 것이었다. 내 기억에 이삿짐 트럭은 없다.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대가족이었기 때문에 이삿짐 트럭이 등장할 만 한데 도대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리어카(손수레)에 짐을 싣고 엄마는 끌고, 나와 누나는 뒤에서 미는 장면이 생생하다. 그 길은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였다. 차도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이라 한가한 도로 위를 우리는 그렇게 함께 갔다. 지금 생각하면 좀 가슴 아픈 장면 같기도 하지만 네 살의 나는 리어카를 미는 일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시간은 오후 4시.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장면은 내 기억 속에 흑백으로 남아 있다. 분명히 기억은 생생한데 어디에도 색깔이 남아있지는 않다. 왜 이 기억이 나라는 존재에게 각인된 세상과의 첫 번째 접속이 되었을까? 이사라는 특별한 사건 때문일까 아니면 장난처럼 리어카를 밀고 가는 재미 때문일까.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점은 있다. 이 기억에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진짜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 프레임 안에 있었다 정도로만 기억된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나에 대한 인식을 통한 세상과의 접속은 다섯 살 때 일어났다. 그 날은 우리 집 마당에서 사촌 동생과 비석 치기 같은 것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 우리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마냥 즐거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게 '사람은 죽는다'라는 절대 명제가 마치 불교의 돈오(頓悟)처럼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이 왔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갑자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도 사람이라는 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한 동안 그 자리에 멈춘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당시에 나는 유치원에도 다니지 않았고,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고 기억한다). 어떻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이 너무나 생생하다. 그 이후로 나는 죽음이라는 존재와 늘 싸워야 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세상에 접속한 최초 (또는 둘째)의 기억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내게는 삶을 최초로 접속한 순간이 죽음을 통해서였으니까 말이다.
현재까지는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당장 몇십 년 후, 몇 백 년 후에 이 명제는 바뀔지도 모른다. 유한하면 유한한 대로, 무한하면 무한한 대로 문제가 산더미이다. 골치 아픈 문제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낙관론자도, 비관론자로 아니지만 그럭저럭 인간은 살아갈 것 같다. 문제는 어떻게 사느냐일 것인데 아직도 우리는 2천 년 전 사고 안에서 살고 있으니 이제는 좀 벗어날 때가 온 것 같기는 하다. 당장은 준, 큐 형제에게 고리타분한 아빠라는 이미지를 벗어나는 일이 시급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p.s : 여러분이 세상에 접속한 최초의 순간은 언제인가요? 댓글로 남겨 주시면 재미 있을 것 같습니다.
<표지의 그림은 아내의 습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