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부잣집 아들

인생 수업

by 조이홍

우리 집은 딸 부잣집이다. 누나가 다섯이다. 그런 집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할머니는 너 하나 보려고 위로 많이 나았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나는 그런가 보다 했지만, 당신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던 누나들에게 그 말은 상처가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모르셨지만, 적어도 남녀평등을 몸소 실천하려고 노력하셨다. 나중에 결혼해서 집안 일도 하고 아내를 많이 도와주라고 늘 말씀하셨다. 지금은 '도와준다'는 말도 조심스러운 분위기지만 고된 시집살이가 당연했던 시절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온 어머니에게는 당신의 한(恨)을 며느리가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셨다.


그런 사정이니 하나뿐인 아들에 대한 프리미엄은 딱히 없었다. 밥상을 차릴 때 반찬을 나르거나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는 일은 내 차지였다. 명절 때면 김에 참기름을 발라 굽는 일도 했다. 송편과 만두도 빚었다. 장난으로 주물럭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빚었다. 물론 백만 가지도 넘는 집안일 중에 몇 가지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도 집안일을 하게 했다. 나도 딱히 불만이 있거나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들 무언가를 하는데 혼자 안 하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물론 혜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의 가정이 지금처럼 외식을 자주 하지 못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린 나는 외식이라는 말을 써 본 기억도 없었다. 오직 한 달에 딱 한 번, 아버지 월급날 통닭을 사서 온 가족이 함께 먹는 것이 전부였다. 주로 막내 누나랑 내가 심부름을 다녀왔다. 통닭 한 마리 가격이 4~5천 원 정도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식구가 많은데도 언제나 딱 한 마리만 사 왔다. 방금 튀긴 통닭은 바로 포장해서 누런 종이에 기름이 잔뜩 배어 있었는데, 포장지를 찢어 펼쳐 놓으면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났다. 침이 꼴깍 넘어가게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한 마리 통닭이 많아야 얼마나 되겠는가. 어머니는 얼른 닭다리 두 개를 집어 아버지와 나에게 하나씩 주셨다. 누나들 중 누구도 자기도 닭다리를 먹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항상 닭목 부위를 고르셨다. 이 부분이 통닭에서 제일 맛있는 거라며 언제나 닭목 부위는 어머니 차지였다. 그리고 늘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닭목을 먹으면 노래를 잘한다고. 나는 어머니가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닭목은 특별히 맛있지도 않고, 더군다나 노래를 잘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께 내 닭다리를 드시라고 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닭 한 마리는 우리 가족이 먹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불평만 했다. 어머니 혹은 누나들에게 양보하기에 닭다리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렇게 닭다리는 내가 아들로서 받은 가장 큰 특혜 중 하나였다.


국민학교 1학년 때 이런 일도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집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어머니가 나만 조용히 불러 함께 어디를 가자고 하셨다. 어머니가 데려간 곳은 중국집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 주시더니 맛있게 먹으라고 했다. 생일도 아닌 그냥 평범한 날들 중 하루였다.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 당시에는 키도 작고 빼빼 마른 아이였다. 밥도 잘 먹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내가 마음에 걸리셨는지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짜장면을 사주신 것이다. 짜장면은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식 메뉴가 아닌가. 더군다나 나만 몰래 먹는 짜장면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젓가락질이 서툴렀지만 정신없이 먹었다. 어머니는 누나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어린 나는 그러겠다고 하면서도 짜장면을 혼자만 먹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자랑할지 궁리했다. 그리고 정말 유치하게 짜장면 소스를 일부러 입에 잔뜩 묻혔다. 물론 이 계획은 어머니에 의해 차단되었고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종종 어머니는 나에게만 짜장면을 사주셨고 아직까지 이 비밀은 누나들에게 들키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이밖에도 <전설의 고향>을 볼 때 어머니의 옆 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언제나 나였다. 중간에 변소에 다녀와도 어머니 옆 자리는 항상 내 차지였다. 상차림을 도왔지만 밥 먹다가 '물'하면 누나들이 항상 떠다 주었다. 그림에 전혀 소질이 없었던 나를 대신해 학교에서 내준 '포스터' 숙제는 누나들이 대신해 주었다. 방학 내내 실컷 놀다가 유일한 숙제였던 탐구생활과 일기 쓰기를 하나도 안 했을 때도 누나들이 도와주었다. 그러다 누나 일기를 그대로 베낀 것이 들통 나 선생님께 혼나기도 했지만 안 해간 친구보다는 덜 혼났던 것 같다. 누나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월급을 받으면 용도도 주고, 옷이나 신발도 사주었다. 그러고 보니 꽤 다양한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


다행히 나는 염치(廉恥)라는 것을 알았다. 누나들에게 받은 사랑을 조카들에게 그대로 대물림해 주고 있다. 성장한 조카들 역시 우리 준, 큐에게 잘한다. 누구도 무언가를 바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마음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언젠가 어린 시절 우리 집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고 누나들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덕분에 형제들 간에 우애가 깊은 것이라고... 인과관계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결핍(缺乏) 덕분에 성(性)이나 이기(利己)보다 '우리'가 앞에 올 수 있었다.


그렇게 딸 부잣집 아들은 모나지 않게 자랐고, 함께 사는 법을 일찍부터 가르쳐 준 어머니께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표지의 그림은 아내의 습작입니다.>


<사족>


내가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 아이들에게 결핍이 있었다. 결핍(缺乏)이란 있어야 할 것이 빠지거나 모자라는 것을 말한다. 정재승 박사가 그의 저서 <열두 발자국>에서 말한 것처럼 '결핍'은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동기(motivation)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가끔 준, 큐 형제를 보면 이 세대의 아이들이 너무 결핍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들기도 한다. 과잉 충족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어 삶의 동기 같은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다.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결핍을 이해시키고 그것을 삶에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만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삶의 어느 순간에 준, 큐 형제가 결핍을 만나게 되더라도 담대한 용기로 맞서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