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수업
어린 시절의 나는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다. 까만 피부에 작은 키, 얼굴까지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키 순서대로 반 번호가 부여되었는데 1학년 때는 6번, 2학년 때는 8번, 3학년 때는 11번이었다. 한 반에 대략 50여 명 정도 되었으니 키는 (작은 순으로) 언제나 상위 20% 이내였다. 그래도 3학년 때에 처음으로 10번을 넘어갔다.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다. 솔직히 10번이었던 친구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키를 재는 날 컨디션이 안 좋았다면 내가 10번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친구와 고2 때 다시 만났는데 나보다 20cm는 더 자라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친구의 눈빛에서 그동안 안 크고 뭐했냐는 안쓰러움과 조소(嘲笑)가 동시에 느껴졌다. 내 성장판은 고3 때 닫혀 버렸다. 그때의 키가 지금의 키다. 딱 169cm. 168cm인 사람은 170cm라고 속이기도 하지만 169cm는 절대 속이지 않는다. +/- 1mm의 오차도 없다. 자존심이다.
군대에서 이등병 시절 별명이 콩사탕이었다. 자대 배치를 받고 내무반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보통 이럴 때 신병은 군화를 신은 채로 침상에 각 잡고 앉아 있게 된다. 가볍게 주먹을 쥐고 양 팔을 쭉 펴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발은 어깨 넓이 정도 벌려 11자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허리를 펴고 주먹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면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발이 바닥에 닿자니 허리가 구부러졌다. 이 모습을 본 실세(實勢) 선임이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다리가 짧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모습이 우스웠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다리가 짧아 콩사탕(딱히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이라고 불렸고, 침상에 앉을 때 발이 약간 뜨는 것을 유일하게 허락받았다. 사실 키에 대한 콤플렉스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특히 군대 시절에 우리 중대는 축구보다 농구를 많이 했는데 가장 작은 내가 대표선수로 나갈 정도였다. 현란한 드리블과 돌파력으로 키 큰 중대원들을 제치고 슛을 성공시켰다. 농구에서도 키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작은 키를 극복할 만한 나만의 기술과 자신감이면 충분했다.
얼굴 고민에 비하면 작은 키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최고조는 중학교 때였다. 못생긴 얼굴이 너무 싫었다. 다른 사람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길러서 한쪽 눈은 가리고 거기에 안경을 쓰면 못생긴 얼굴이 좀 덜 보일 것 같았다. 완벽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시력이 너무 좋았다. 양쪽 모두 1.5였다. 시력이 좋은 아들에게 안경을 사주실 것 같지는 않았다. 시력이 나빠지게 하려고 책을 얼굴 앞에 대고 읽거나 TV를 엄청 가까이서 봤다. 그렇게 몇 주를 노력하고 어머니께 눈이 잘 안 보여 안경을 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와 함께 안경점에 갔다. 시력표야 안 보인다고 하면 될 테니 안경은 내 손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안경점 아저씨가 이상한 기계에 눈을 갖다 대라고 하더니 시력이 아주 좋다고 하셨다. 안경 쓸 필요도 없을 것 같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다행이라고 하셨지만, 나는 더 불행해졌다. 이렇게 얼굴 가리기 계획은 실패로 끝이 났다.
신은 내게 얼굴과 키를 주지 않은 것이 내심 미안했던지 약간의 재치와 입담을 주셨다. 그리고 빠르게 포기하는 능력도 주셨다. 외모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결론에 일찍 도달했다. 물론 그때도 성형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내게 선택지는 아니었다. 부모님이 허락해 주시지도 않겠지만 나도 무서워서 싫었다. 미운 오리 새끼가 알고 보니 백조였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미운 오리 새끼 중에는 좀 괜찮은 오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나아질 수 있는 것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외모 콤플렉스는 끝이 났냐고? 아니다. 나는 좀 더 멀리 내다보기로 했다. 내 자식들은 나처럼 외모 때문에 힘들지 않게 결혼은 꼭 아름답고 예쁜 사람과 해야 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대목에서 누구는 속물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비판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오랜 시간 외모 때문에 고민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심성이나 됨됨이도 중요하지만 외모가 1순위였다.
결국 너무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에서 외모는 정말 중요하지 않더라......) 어린 시절 길거리 캐스팅 경험이 있는 얼굴 장인 준과 갈수록 멋져지는 큐가 태어났다. 이대로만 자라준다면 준, 큐 형제는 나 같은 외모 고민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최근에 30여 년간 잠들어 있던 외모 콤플렉스가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가 최고조로 달할 무렵 내 몸무게는 90kg에 육박했다. 야식과 음주만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라 쉬지 않고 먹고 마신 탓이었다. 살찐 남자들의 공통점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절대로 살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요즘 살찐 것 같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과 셀카를 찍었는데 아이들 옆에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터질 것 같은 얼굴에 배는 남산만 했다. 도저히 나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몇 해 전에 GAP 패밀리 세일을 할 때 엄청난 가격 할인에 입지도 못할 작은 치수의 바지를 거의 10벌 정도 사둔 적이 있었다. 물론 싸다는 이유로 무작정 산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나는 패셔니스타인 GD의 패션에 빠져 있었다. 같은 남자로 태어났는데 나도 GD처럼 멋지게 입어보고 싶었다. 그전까지 나에게 옷이란 추위로부터 보호해주고 문명인임을 깨닫게 해 주는 최소한의 도구였다. 그런 내가 패션의 관점에서 옷을 보게 된 것이다. 나는 옷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 두었던 옷들을 꺼냈다. 그리고 그 옷들을 입기 위한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물론 이전에도 다이어트를 시도한 적은 많았다. 한방 다이어트, 원푸드 다이어트, 간헐적 단식과 헬스 등 다양하게 시도했었다. 하지만 3~4kg 정도 몸무게가 빠지면 금방 요요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꼭 빼고 싶었다. 처음 회사에 입사할 때의 몸무게가 목표였다. 약 20kg 이상을 빼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두 달 동안 약 12kg을 감량했다.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한약도 함께 먹었다. 매일 한두 시간씩 운동도 했다. 12kg 정도 빠지니 몸이 가벼워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다이어트를 끝내야 했다. 덕분에 사두었던 바지는 오히려 너무 헐렁해서 입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살을 빼고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입었지만 GD 같은 느낌은 나지 않았다. 패완얼(패션의 완성은 얼굴) 때문이었다. 결국 다시 얼굴로 돌아오는 건가? 이것은 무슨 뫼비우스의 띠도 아니고 끝이 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내, 토끼 같은 자식과 행복하면 되었지, 무슨 모델할 것도 아니고! 그런데 요즘 머리가 너무 많이 빠지는 것 같은데......
<표지 그림은 큐의 작품 '자화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