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30년 5월
잠잘 때를 제외하면 온종일 숲에서 뛰어노는 하루는 순한 집고양이라기보다 차라리 야생 삵에 가까웠다. 크고 날렵한 녀석에게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상혁은 가끔 순둥순둥하던 새끼 고양이 시절의 하루가 그리웠다. 인간과 지내도록 수천 년을 진화한 동물이 자연에서 생활하는 게 다소 걱정되었지만, 좁은 원룸에서 단둘이 지낼 때보다 하루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가끔 들쥐나 청설모를 잡아 현관 앞에 두지만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제 자신의 영향력 밖으로 벗어난 하루가 밤이면 잊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한울시로 이사 온 지 꼬박 1년이 지났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인 아버지의 옛집이 이제 상혁과 하루의 새집이 되었다. 새로운 일상에는 배울 게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나무라고는 소나무와 은행나무밖에 모르던 상혁은 몇 번 본 나무는 신기하리만치 기억해냈다. 자신이 그토록 머리가 좋았었나 싶을 정도였다. 요즘은 같은 참나뭇과라도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그리고 상수리나무가 어떻게 다른지 구분할 줄 알았다. 사람 얼굴이 제각각 다르듯이 얼핏 비슷해 보여도 나무들도 똑같은 나무는 하나도 없었다. 요강나물, 종덩굴, 개버무리, 참으아리, 후추등, 매발톱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등 이름이 독특한 식물들도 줄줄이 꿰뚫었다. 아버지가 20년 동안 정성스레 쓴 나무 일기장도 한몫했다. 스무 권이 넘는 공책에는 아버지가 직접 심은 나무뿐만 아니라 한울시에 서식하는 나무들과 식물들이 손수 그린 그림과 함께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산림공원과 행정 업무는 경희가 틈틈이 가르쳤다. 호수정원과 중앙공원을 비롯한 크고 작은 공원의 나무를 관리하는 게 상혁의 업무였지만, 가끔 일반적인 행정 업무도 처리해야 했기에 경희는 훌륭한 조력자가 되어 주었다. 가끔 꼰대 선배 역할을 자처하긴 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상혁은 그녀와 같은 중학교에 다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가 불쑥 꺼낸 중학교 졸업 앨범 덕분이었다. 심지어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혁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두 사람은 그날 이후 친구가 되었다. 오늘은 모처럼 호수공원 슈퍼트리의 덩굴과 식물 실태조사를 위해 두 사람이 함께 외근 업무에 나섰다. 한가한 트램 안에서 문득 경희가 물었다.
“상혁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가늘어진 상혁의 눈이 경희의 커다란 눈과 허공에서 교차했다.
“글쎄, 곤란한 질문만 아니라면.”
“나무 할아버지, 아니 너희 아버지는 왜 평생을 오롯이 나무 심기에 쏟아부으신 걸까? 모두에게 잘된 일이긴 하지만, 항상 궁금했거든.”
“산림공원과 공무원이 그걸 몰라서 물어? 아낌없이 주는 존재가 나무잖아. 무더운 여름을 서늘하게 식혀주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아주기도 하잖아. 그것뿐인가? 맛 좋은 열매를 나눠주고,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고, 때론 개구쟁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주기도 하잖아. 멋진 풍경에 나무가 없다고 상상해봐. 얼마나 삭막하겠어? 모두가 잠든 밤에 바람이 나무를 연주하는 소리는 또 어떻고? 난 이곳에 내려와서 불면증이 다 사라졌다니까. 이런 나무라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셨겠지.”
경희가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나무 선생님 납시셨네. 그런 교과서적인 대답을 원하는 게 아니잖아. 2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편지 내용은 무언지 궁금하다는 의미잖아. 알면서….”
“그리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냥 우리 가족사로 묻어두고 싶어. 미안해.”
“그래, 뭐 난 남이니까. 알았어. 흥!”
상혁은 경희와 만나고 돌아온 날 밤 아버지의 편지를 읽었다. 눈물로 이곳저곳이 번졌지만 읽기 어렵지는 않았다. 상혁은 아버지가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눌러쓴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비로소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했다. 아버지가 죽은 어머니와 형이 아니라 살아남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자신을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와 형을 비롯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바이러스가 인간이 나무를 베고 숲을 훼손한 결과라는 사실을 텔레비전 뉴스에서 본 아버지는 농사도 포기하고 넓은 땅에 나무를 심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과학자도 의사도 아닌 아버지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이었다. 평생 땅에 의지해 살아온 아버지는 땅을 믿었다. 그가 매일매일 심은 작은 묘목이 언젠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다시 수많은 생명들의 보금자리가 되리라는 사실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손가락질하고 또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수군거렸을 터였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처음 만났던 날 경희가 말한 것처럼 아버지가 나무를 심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환경 수도 한울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더 빨리, 더 편하게, 더 많이! 이런 말들이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고 빠르게 변화시켰다. 스마트폰에서 앱을 열고 버튼 몇 개만 누르면 주문한 물건이 당일 밤, 늦어도 다음 날 새벽이면 문 앞에 도착했다. 어떤 일에는 속도가 중요하지만, 어떤 일에는 기나긴 기다림도 필요한 법이라는 걸 상혁은 아버지를 통해 배웠다. 20년이나 걸린 가르침이지만 이제라도 깨닫게 되어 다행이었다. 상혁은 퇴근 후 집 주위 빈터에 어떤 나무를 심을지 고민했다. 어제 왕쥐똥나무를 심었으니 오늘은 바위수국을 심어 볼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 사이 트램이 15번 슈퍼트리 앞 정류장에 멈춰 섰다. 경희는 내릴 마음이라곤 없는 상혁의 손을 재빨리 잡아끌었다. 두 사람이 정류장에서 손을 맞잡은 채 조각상처럼 굳어버렸다. 때마침 호수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가 아찔했다. 한울의 여름이 무르익어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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