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歸鄕). Chapter 4

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30년 5월

by 조이홍

1층을 내려다보던 상혁의 시선이 급하게 경희를 향했다. 놀라지 않은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재채기만큼이나 감추기 힘들었다.

“어, 엄청난 제안이라니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아이디어였죠. 수만 평이 넘는 땅을 한울시에 기부하는 대신 몇 가지 조건을 내세우셨죠. 그 조건들이 자연을 그대로 닮은 환경 도시를 만드는 데 이바지한 셈이죠.”

“어, 어떤 조건들이었길래요?”

“원주민들이 지정한 환경단체 및 전문가와 도시개발계획을 부분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는 한 그루도 베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모든 건물은 친환경 건축 인증 제도인 녹색건축인증에서 최우수 그린 1등급을 받도록 재설계하는 것이었죠, 친환경 대중교통을 도입하고 자동차 없는 거리나 자전거 전용 도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런 조건들을 정부가 받아들였다는 겁니까? 말도 안 돼요. 시골 동네에 사는 평범한 노인이 나랏일에 제동을 걸었다고요?”

“꽤 유명한 사건이었는데 상혁 씨는 어디 외국에라도 다녀오셨나 봐요? 나무 할아버지 혼자라면 불가능했겠죠. 할아버지는 혼자가 아니었어요. 뜻을 함께 하는 수많은 주민들과 환경 단체, 그리고 몇몇 연예인들도 SNS를 통해 할아버지를 지지했으니까요. 환경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에서는 법적으로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기도 했죠. 여론도 유리하게 작용했고요. 극히 드물지만 지구가 뜨거워지는 걸 걱정하는 행정가들과 정치인들의 도움도 한몫했죠.”

“제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네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요.”

상혁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같은 사람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싸웠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문득 어머니와 형이 음압병실에서 사경을 헤맬 때도 나섰더라면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상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한 꼴이었다.

“어떤 계기가 있었겠죠.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버지, 아니 당신들은 결국 그 싸움에서 승리했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치열하게 싸웠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울시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여느 신도시들과 다름없었겠죠.”

“늦었지만 위대한 승리에 축배라도 들어야겠군요.”

“권상혁 씨는 사춘기 소년처럼 배배 꼬였군요. 그때나 지금이나.”

잠깐 동안 경희의 커다란 눈이 허공을 헤맸다.

“네? 뭐라고요?”

“아니에요. 혼잣말입니다. 참,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깜빡했네요. 청사가 들어선 이곳이 나무 할아버지께서 기부한 땅이랍니다. 오래된 물레방아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풍경이 익숙하지 않던가요? 소정리 물레방아와 그 일대로 꾸며 놓았답니다. 나무 할아버지 아이디어였죠. 고향을 잃은 이들이 청사를 방문하면 자연스레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게요. 청사 구석구석에 옛 마을들의 풍경을 옮겨 놓았습니다. 이곳 민원인 쉼터도 우리 마을에 있던 오래된 정자를 옮겨왔지요. 일종의 이스터 에그라고나 할까요. 청사를 둘러보는 게 권상혁 씨에게도 의미 있을 것 같아 산책하자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뜻밖에 이야기에 바위처럼 단단한 상혁의 가슴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아버지도 고향도 처음부터 없던 것이라 여기며 살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청사에 발을 내디딘 순간 설명할 수 없는 포근함이 싫지 않았다. 상혁은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자꾸 솟아오르는 걸 참아 내느라 무던히 애써야만 했다. 집에 있는 하루를 떠올렸다. 이제 자신의 고향은 하루가 있는 지하 원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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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말씀드렸던 행정 처리라는 걸 진행해볼까요?”

“거짓말이라면서요?”

“과태료가 거짓말이라는 거죠. 몇 가지 처리할 사항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혹시 오시는 길에 한울 중앙공원에 들르셨나요?”

“네? 네. 트램에서 깜빡 졸아서요.”

“잘됐네요. 한울 중앙공원 가운데 있는 커다란 구릉 보셨죠? 단풍나무가 울창한 아름다운 숲이죠. 그곳이 나무 할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나무를 심은 곳이랍니다. 할아버지는 나무에 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전문가였죠. 나무 의사이기도 했고요. 공식적으로는 한울시 산림공원과 공무원이셨답니다. 할아버지는 나무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 맡아주기를 원하셨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권상혁 씨를 추천하셨죠. 한울시는 나무 할아버지가 보여주셨던 노력과 헌신을 고려해 검토를 끝마쳤습니다. 아, 물론 선택은 오롯이 권상혁 씨에게 달려있습니다.”

더 놀랄 일이 있는가 싶었는데 예고 없이 훅 들어온 경희의 말에 상혁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게 당신이 아버지께 부탁받은 일인가요?”

“아니요. 말씀드린 것처럼 이건 행정 처리일 뿐입니다. 나무 할아버지께서 부탁한 일은 따로 있습니다. 이 편지를 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경희는 재생지로 만든 회색 서류 봉투에서 누런 편지 봉투를 꺼내 상혁 앞으로 밀었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띄었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권상혁 씨가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한울시 공무원으로서 적절한 급여와 복리후생을 제공받게 될 것입니다. 관사까지도요. 물론 관사란 게 나무 할아버지가 살던 집을 손본 정도지만요. 그 집은 권상혁 씨에게도 의미 있는 장소겠지요. 지금 당장 결정하실 필요는 없지만, 기왕이면 빠른 시일 내에 결과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벌써 일이 밀리기 시작했거든요. 자, 제가 드릴 말씀은 모두 끝났습니다. 궁금한 사항이 없으시면 먼저 일어나야겠네요.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둬서요. 마음이 정해지면 이 명함의 전화번호로 연락 바랍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권상혁 씨.”


상혁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탁자 위에 올려진 명함만 뚫어지게 쳐다보느라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지난 20년 동안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를 떠난 이후로 셀 수 없이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편의점, 피시방, 카페, 식당 아르바이트는 기본이고 영화나 드라마 단역, 공사장 일용직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런 자신이 갑자기 나랏일을 하게 되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꿈속에서조차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전에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았다. 아버지를 용서해야만 했다.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텅 빈 머릿속이 어느새 하루가 어질러 놓은 손바닥만 한 자신의 원룸처럼 난장판이 되었다. 그 순간 경희가 건네준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편지였다. 아니 두 번째던가? 중학교 때 웬 여자아이로부터 고백 편지를 받았더랬다. 이메일과 문자가 흔해 아무도 편지로 마음을 전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글씨가 참 바르고 고왔더랬다. 상혁은 앞에 놓인 편지가 낯설고 두려웠다. 읽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에 두 손이 저절로 편지에 가 닿았다. 속이 비칠 정도로 얇은 봉투를 찢고 하얀 편지지를 꺼냈다. 연필로 정성스럽게 눌러쓴 글자들이 편지지를 빼곡히 채웠다. 상혁은 편지를 읽을 수 없었다. 눈물이 자꾸만 시야를 가려 글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알아볼 수 있는 건 편지지 맨 위에 적힌 ‘사랑하는 아들에게’라는 한 문장뿐이었다. 상혁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눈물이 편지지 위로 떨어져 번졌다. 상관없었다. 편지를 읽지 않아도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낮의 태양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물레방아는 여전히 시원하게 돌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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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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