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30년 5월
상혁이 망각의 강 저 너머로 밀어낸 나룻배에는 어머니와 형이 잠들어 있었다. 20년 전, 전 세계적으로 끔찍한 전염병이 돌았다. 하루에도 수십만 명이 감염되었고 사망자는 수백만 명에 달했다. 2000년대 초반에도 세계인의 간담을 서늘케 한 몇몇 바이러스가 유행했지만, COVID19만큼 치명적이고 집요하지는 않았더랬다. 인간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바이러스가 자주 출몰하는 원인에 대해 누구도 속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개 일치했다. 기후 변화와 마찬가지로 바이러스 역시 우리 인간 때문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엄청난 넓이의 숲을 파괴했다. 푸짐한 식탁에 빠질 수 없는 소를 키우기 위해 손대지 말아야 할 지구의 허파마저 파괴했다. 그 결과 수많은 야생동물이 갈 곳을 잃었다. 집을 잃은 동물들은 인간이 키우는 가축들과 접촉했고, 때론 인간과 직접 접촉했다. 그렇게 인간은 새로운 바이러스에 노출되었고, 새로운 바이러스 앞에서 꾸준히 진화해온 인간의 항체는 무기력했다. 보건 당국은 언론을 통해 매일매일 전염병 상황을 전달했다.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자식이며 고유한 개성과 이름을 가진 이들의 죽음이 ‘사망자 수 몇 명’으로 표기되었다. 불행하게도 어머니와 형도 그 숫자들의 일부가 되었다. 소중한 사람을 한꺼번에 둘이나 잃은 상혁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맹목적인 적의는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했다. 그러다 그가 가슴으로 벼린 날카로운 칼날은 농사일밖에 모르는 무능한 아버지를 향했다. 크고 시설이 좋은 병원으로 일찍 옮겼더라면 두 사람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점점 확신으로 변했다. 넓디넓은 땅 일부만 처분해도 가능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데도 아버지는 병원이 아니라 논에 나갔다. 설상가상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돼 죽은 이들은 온전한 장례식마저 치르지 못했다. 중세시대도 아닌데 사망자를 통해서 감염병이 전파된다는 과학적인 근거 없이 화장(火葬)부터 시켰다. 전염병은 애도의 마음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의 죽음 앞에서 무덤덤하고 또 무기력했다. 상혁은 그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오던 날 상혁은 더 이상 아버지와 단둘이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책가방에 책 대신 양말과 속옷, 그리고 어릴 때부터 착실하게 모았던 저금통을 챙겼다. 새벽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시원한 차 한잔하세요. 생태 정원에서 직접 가꾼 오미자입니다. 민원인들이 즐길 수 있도록 늘 준비해 둔답니다. 이곳을 찾는 분들은 종종 성나 계시거든요. 마음을 좀 가라앉혀 줄 거예요.”
경희가 노란 은행나무잎이 반드럽게 그려진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상혁은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그녀에게 들키기 싫어 선뜻 찻잔을 받아 들지 못했다. 사실 그건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상혁의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경희는 다시 한번 찻잔을 그의 얼굴로 들이밀었다. 상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찻잔을 받아 들고는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을 통해 온몸에 전해졌다. 3층 민원인 쉼터에서는 1층 로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상혁은 오미자차를 마시며 쉼 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권상혁 씨와 나무 할아버지 사이에 어떤 복잡한 사연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궁금하지만 그걸 여쭤보는 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 같네요. 위험은 한 번으로 충분하니 제 호기심은 고이 접어 넣어두겠습니다. 참, 제 고향도 한울입니다. 물론 그때는 큰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대정리라고 불렸지만요.”
오미자차를 한 모금 삼키던 상혁은 대정리라는 이름에 그만 사레들렸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자, 잠시만요. 대정리라면 바로 옆 마을이었네요?”
“네, 소정리와 대정리는 사이좋은 이웃 마을이었죠. 전 어려서부터 한울이 환경 도시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순탄치만은 않은 길이었죠. 고향을 지키던 사람들은 한울이 삭막한 회색 빌딩 숲으로 변하는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기왕 개발해야 한다면 실속 없이 이름만 번지르르한 환경 수도가 아니라 진짜 친환경 도시로 거듭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싸웠습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매일 싸웠죠. 그리고 언제나 맨 앞에 나무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누구보다 격렬하게 싸우셨죠.”
“아버지가요? 왜요?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경희의 커다란 눈이 더 동그래졌다.
“그때 나무 할아버지는 그랬는걸요. 가까이 다가가기에 두려울 정도였죠.”
“그래서 제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죠?”
“한울 도시개발 사업추진위원회는 나무 할아버지의 협조가 절실했습니다. 개인이 소유한 가장 넓은 땅이기도 했고, 향후 새로운 도시의 중심지가 될 땅이었으니까요. 문제는 할아버지가 언제부턴가 그 넓은 땅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요. 도시개발이 확정되면서 여러 마을이 로또에 당첨됐다고 호들갑을 떨 때도 묵묵히 나무만 심으셨데요. 물론 정부가 공공사업을 시행하면 토지를 강제 수용할 수 있지만, 환경단체나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해 여름이 유난히 더웠거든요. 나무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에게 엄청난 제안을 하셨습니다.”
1층을 내려다보던 상혁의 시선이 급하게 경희를 향했다.
“엄청난 제안이라니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