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위조 보호장치의 아주 짧은 역사
궂은비 내리는 날 /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 새빨간 립스틱에 /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 보렴 /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 낭만에 대하여
호소력 짙은 음색이 매력적인 가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들을 때마다 5~60년대 노스탤지어에 흠뻑 취하곤 한다. 70년대 생인 내게 그 시절 추억이 존재할 리 만무하지만, 애절한 노랫말과 구성진 리듬은 듣는 이를 어느새 쿰쿰하고 어둑어둑한 옛날식 다방 한 켠으로 인도했다. 비록 사는 건 전쟁 같아도 '배곯지 말자!'라는 절실한 목표가 있었기에 청춘을 불태워 일하고, 사랑하고, 취했던 시절일 터였다. 물 먹은 스펀지처럼 감성에 취해 촌스러운 60년대 종로 거리를 비틀거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직업적인 호기심도 발동했다. '잠깐, 도라지 위스키라고? 도대체 우리나라에 언제 이런 위스키가 있었던가?' 하고 말이다.
우리나라 위스키 역사는 18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중학교 국사 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려 보면 된다. 조선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다. 이로 인해 부산, 원산, 인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의 치외법권을 인정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미국도 조선과의 수교를 서둘러 1882년 마찬가지로 불평등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치외법권, 최혜국 대우)을 체결했다. 이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관세 및 수출세 등을 규정한 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조선은 서구 열강의, 좋게 말해, 신흥 시장으로 떠올랐다. 이로 인해 수많은 서구문물이 조선으로 흘러들어왔고 위스키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조선에 들어온 위스키는 주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그리고 미국산이었다. 도라지 위스키를 이야기하다가 생뚱맞게 역사 공부는 왜 했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기 때문은 아니고 이야기가 모두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도라지 위스키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참, 그전에 위스키란 무엇인지 살펴보자. 간단히 말해서 발효된 곡물로 만든 술을 증류하고 나무통에 숙성한 것을 위스키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1973년 정부의 위스키 원액 수입 허가 이전에 공식적으로 위스키 원액을 들여올 수 없었다. 따라서 그 이전에 국내에서 만들어진 위스키는 비록 '위스키'라는 이름이 붙었더라도 위스키 원액은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유사 위스키'였다. 통상 단식 증류기로 빚은 소주 베이스에 위스키 색과 향만 입혔다. 해방 직후인 1946년 11월, 미군정 상무부령으로 쌀을 원료로 하는 막걸리 생산을 금지시킨 '양조정지령'이 내려진다. 막걸리 제조 금지는 위스키나 브랜디 같은 외국 술의 밀매 급증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이때 일본산 위스키 가운데 산토리에서 만든 '토리스 위스키' 밀수가 성행했다. 특히 일본과 가까운 부산과 경남 해안에서는 밤마다 토리스 위스키를 가득 실은 밀수선이 마치 유령선처럼 드나들었다. 토리스 위스키가 유행하자 유사 제품인 '도리스 위스키'가 부산의 한 양조장에서 정식으로 제조, 판매되었다. 1955년 당시 유사 위스키도 기타 제재주로 면허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리스 위스키 역시 위스키 원액은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았다. 일본 토리스 위스키와 도리스 위스키의 유사성을 부산의 한 지역신문이 문제 제기했고, 결국 불법 상표 도용으로 1960년 2월 도리스 위스키를 만들던 양조장은 문을 닫고 대표는 구속된다. 구속에서 풀려난 양조장 대표는 도리스 위스키를 '도라지 위스키'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사업을 재개한다. 우리가 흥에 겨워 그토록 불러댔던 도라지 위스키는 이렇게 탄생했다. 1960년대 말 국내 위스키 시장을 주도했던 브랜드는 도라지 위스키 이외에도 쌍마 위스키, 백양 위스키, 화성 위스키, 오스카 위스키 등이 있다. 이들 역시 모두 유사 위스키다.
사실 유사 위스키는 불법도 아니고 나쁜 술도 아니었다. 위스키 원액이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술을 어떻게 위스키라고 불렀는지 따진다면 변명이 궁색하지만, 해방 공간과 6·25 전쟁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마냥 몰아세울 수만은 없을 터였다. 사실 지금이나 그때나 나쁜 건 부정 또는 위조 위스키였다. 부정 위스키에 대한 기록은 1924년부터 등장한다. 증류기로 만든 주정에 녹차를 섞어 만든 가짜 위스키에 관한 기사가 1924년 8월 2일 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보리차를 위스키라고 속여 팔거나 녹차를 섞는 것은 애교 수준이었다. 적어도 마실 수는 있으니 말이다. 해방 직후 외국 술의 밀매가 급증함과 동시에 메틸알코올로 만든 가짜 브랜디와 가짜 위스키가 유통되면서 죽거나 눈이 멀거나 반신불수가 된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심지어 당국에서 위스키 제조 허가를 받은 회사(해림)도 메틸알코올을 넣은 가짜 위스키를 만들었다. 이 회사의 제품(고래표 위스키)을 종로의 한 요릿집에서 마신 남자가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림과 요릿집은 폐쇄되고 관계자들은 구속된다. 우리 입에 들어가는 먹을 것, 마실 것에 요망한 짓을 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엄하게 다스렸다.
이런 역사적인 원죄의식 때문일까? 1990년대 이후 국내 위스키 시장의 한 축은 '가짜 위스키'와의 전쟁이었다. 소비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위조 보호장치'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가짜 위스키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음식점(주점)에서 손님이 남기고 간 위스키들을 한 병에 모아 새 제품으로 판매하는 경우다. 이런 제품은 마셔도 무방하지만, 위생적이지 않은 데다가 제조 과정에서 이물질이 들어갈 수도 있으니 분명 가짜 위스키다. 두 번째는 가짜 위스키 제조업자가 빈병과 라벨, 마개 등을 구해 대량으로 가짜 위스키를 생산하는 경우다. 이때 베이스로 사용하는 원액은 주로 저렴한 위스키나 일반증류주다.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좀 논다는 아이들이 몰래 숨겨 온 '캡틴큐'도 베이스 원액으로 사용되었다. 마지막은 가장 악랄한 경우로 바로 공업용 알코올인 메틸알코올로 가짜 위스키를 만드는 것이다. 위스키 업계에 종사하면서 앞의 두 사례는 실제로 많이 보고 경험도 했지만, 다행히 마지막 사례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어떤 경우이든 세 가지 모두 빈 병에 액체를 다시 주입해야 만들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 임페리얼은 2001년 국내 최초로 위조 보호장치를 도입했다. 정확한 용어는 '재주입 방지장치', 일명 키퍼 캡(Keeper Cap)이었다. 기존 패키지(병)처럼 뻥 뚫린 주입구가 아니라 액체를 다시 주입할 수 없도록 특별히 제작한 장치(캡)를 주입구에 장착했다. 키퍼 캡이 장착된 임페리얼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시 액체를 주입할 수 없으니 고객과 소비자의 반응은 엇갈렸다. 남은 위스키를 모아 새 제품으로 판매하는 관행이 어렵게 되었으니 키퍼 캡을 장착한 임페리얼의 판매를 꺼리는 고객(주점)이 늘어났다. 하지만 소비자는 열광했다. 증류주는 제조 공정상 숙취가 생기기 어려운데 다음 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면 '내가 어제 가짜 위스키를 먹었나?' 누구나 한 번쯤 의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광고는 커다란 자물쇠를 이미지화했는데 소비자들이 주점에서 '자물쇠 달린 위스키'를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결국 답은 소비자에게 있었다.
임페리얼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윈저 프리미어가 재주입 방지장치를 도입한 건 이로부터 4년 후의 일이었다. 당시 부동의 1위 자리를 차지했던 임페리얼의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고, 2위 윈저는 '잃어버린 4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둘의 운명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위조 보호장치가 소비자가 원하는 전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키퍼 캡은 완벽에 가까운 장치였으나 완벽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업계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은 키퍼 캡이 재주입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키려는 자가 있으면 뚫으려는 자가 있는 법이었다. 기존에 아무 장치도 없던 제품보다 번거롭고 노력이 필요했지만, 재주입이 가능해졌다. 대량으로 가짜 위스키를 생산하는 불법 제조자들은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났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에는 윈저가 먼저 선수 쳤다. 2007년, 기존 재주입 방지장치를 업그레이드한 일명 '윈저 체커'를 도입한 것이다. 임페리얼 키퍼 캡은 기능이 뛰어났지만 구조적인 특성상 소비자가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체커는 달랐다. 마개를 개봉하면 작은 추가 아래로 떨어져 소비자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졌다. 업계 1위이자 위조 보호장치에서 선구자적인 이미지를 쌓아왔던 임페리얼로서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했다. 키퍼 캡에 안주하는 사이 라이벌로부터 치명타을 맞은 것이다.
물론 임페리얼이 성공에 취해 마냥 놀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임페리얼도 비밀리에 새로운 위조 보호장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라이벌인 윈저가 시각에 집중했다면 임페리얼은 보고, 듣고, 느끼는 세 가지 감각을 모두 충족시키는 강력한 위조 보호장치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2008년 소개된 '트리플 키퍼'였다. 마개를 개봉하면 '드르륵' 소리와 함께 작은 진동이 손끝에 전해지면서 '정품(正品)'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방식이었다. 광고는 3중으로 된 금고 다이얼을 이미지화했다. 이 크리에이티브를 광고 대행사와 함께 준비하면서 '이스터 에그' 하나를 심어놓았다. 아래 광고 이미지를 보면 정품이라는 글자 라인에 맞춰 금고 다이얼이 '103'에 맞춰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103은 10월 3일을 의미한다(그렇다 오늘이다). 그리고 10월 3일은 아내와 내가 결혼식을 올린 날이다. 어차피 아무 숫자나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니, 추가로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고, 기왕이면 의미 있는 숫자를 남기고 싶었다. 매일 야근하는 보람(야근 수당도 없이)을 이렇게라도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두 라이벌이 위조 보호장치로 한창 전쟁 중이었지만 사실 위스키 소비자는 전혀 다른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더 이상 가짜 위스키는 소비자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전처럼 가짜 위스키가 많이 유통되지도 않았고,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 사실 예전에도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다. 다만 산업 특성상 단 한 건의 사건이라도 발생하면 커다란 이슈가 되었기에 엄청나게 많은 것처럼 부풀려진 측면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국세청이 2012년 10월 본격적으로 RFID 태그 부착을 의무화하면서 공식적으로 가짜 양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위스키의 대명사가 된 스카치위스키는 밀주업자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환상적인 황금빛 액체와 온갖 다양한 향미를 갖추지 못한 독한 증류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무거운 세금을 피하기 위해 산으로 숨어들었고 그렇게 우연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져 우리가 아는 위스키가 탄생했다. 그들은 스스로 전통을 창조했고 그 고지식한 방법을 오늘날에도 지키려 노력한다. 스카치위스키 산업이 한창 번성할 때인 1898년 잘 나가던 위스키 회사가 싸구려 위스키(그레인위스키에 색깔만 입힌)를 '최고급 글렌리벳' 위스키로 판매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책임자가 감옥에 간 건 말할 것도 없고 주가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로 인해 위스키 업계가 휘청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전통을 위협하는 어떤 일탈도 용납하지 않았다. 짧은 국내 위스키 역사에서도 전통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을까 자문해 본다. 아직은 수많은 물음표들이 머릿속에 가득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첫 페이지를 써 내려갔을 뿐이니 다음 페이지를 준비해야 한다.
여기까지 긴 글을 읽느라 고생한 분들께 가짜 위스키를 마시지 않는 비법을 공개할까 한다. 이 방법이면 가짜 위스키를 마실 확률은 제로에 수렴한다. 과연 그 비법이란 무엇일까? 어디에서 위스키를 마시든 직접 개봉하면 된다. 그 위스키가 만약 스카치나 아이리시 위스키라면 당신과 만나기 위해 최소 3년을 답답한 오크통에서 견디며 수양했다. 직접 개봉하는 간단한 노력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 참고 문헌
- 케빈 R. 코사르 <위스키의 지구사> 중 '한국 위스키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