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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06. 2022

술로 읽는 고전 <위대한 개츠비>

술이 사랑한 천재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

 90년대 말, IMF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다 총성 없는 전쟁터라는 사회에 내던져졌다. 그때까지도 그럴싸한 꿈이 없었다. 현실 도피성 대학원 진학을 계획하다 당시 아버지께서 평생 공부할 거면 딱 1년만 직장생활이란 걸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아버지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눈 진지한 인생 상담이었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기에 아무런 준비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등 브랜드가 수십 개도 넘는 식품 대기업(당시는 중소기업)에 운 좋게 인턴사원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소속이 생기니 거리를 지나다 보면 식품 회사 배송 차량만 보였다. 도로에 식품회사 차들이 이렇게나 많았나 싶었다. '아,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세상이 달라 보였다. 동쪽에서 은인을 만나 운명처럼 주류회사에 들어가자 이제는 거짓말처럼 주류 배송 차량만 보였다. 보려고 보는 게 아닌데도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그때 깨달았다.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인다는 것을 말이다. 굳이 비트겐슈타인을 들먹이지 않아도 '인식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는 사실을 체감했다. '술'이라는 안경을, 때로는 망원경도 되고 또 때로는 현미경도 되는, 통해 본 세상은 이제껏 알던 현실과는 분명히 달랐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던 <위대한 개츠비>도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읽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일상적 경험을 초월적 가능성으로 바꾸는 '탁월한 재능'을 의미하는 ‘개츠비적(Gatsbyesque)’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위대한 개츠비>는 아직도 매해 50만 부 이상 팔리며 현대 미국인이 사랑하는 소설 목록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위대한 작품이다. 이런 걸작을 탄생시킨 F. 스콧 피츠제럴드는 글 쓸 때마다 문장의 미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풋내기 작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다. 매 순간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했을까?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면 피츠제럴드가 마냥 행복했던 것 같지는 않다. 1925년 초판이 출간되었을 때만 해도 <위대한 개츠비>가 실패작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호평과 악평이 뒤섞여 나왔고, 2만 부를 간신히 넘기는 판매량을 보였다. 1920년 데뷔 소설인 <낙원의 이쪽>으로 크나큰 성공을 거두면서 일약 스타 작가 반열에 오른 피츠제럴드에게 <위대한 개츠비>는 오히려 인생의 쓴맛을 안겨주었을 터였다. 첫사랑에게 버림받은 제이 개츠비처럼 말이다. 작가로서 부침이 심했던 피츠제럴드는 오랫동안 술을 즐겼고 심지어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무려 여덟 번이나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을 드나들었다. 인생 후반부, MGM 영화사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던 그가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그녀의 비서이자 조수로 일했던 프랜시스 크롤 링의 회고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수시로 텅 빈 진 병을 감자 부대에 가득 담아 덤불이 무성한 계곡에 버렸다고 기록했다. 평소 피츠제럴드는 진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진을 당시 사교계의 잇템으로 만드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서 말이다. 

 진, 얼음, 탄산수, 그리고 라임즙으로 만드는 진 리키(Gin Rickey)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칵테일이었다. 피츠제럴드 역시 이 음료를 즐겨 마셨을 뿐만 아니라 작품에도 등장시켰다.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에서였다. 오랫동안 데이지와 재회를 준비하던 개츠비는 닉을 설득해 마침내 그녀를 자신의 대저택에 초대한다. 마치 놀이공원에 소풍 온 어린아이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그녀에게 소개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재력가가 되었는지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돈 때문에 사랑을 잃은 남자의 어쩌면 찌질한 쇼맨십이었으나 밉지만은 않다. 그런데 기분 좋아진 데이지가 덜컥 개츠비와 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개츠비는 갑작스러운 초대에 불안해하지만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데이지는 오히려 자신의 아이를 옛 연인에게 인사시킨다. 푹푹 찌는 날이었다. 이런 숨 막히는 분위기에 데이지의 남편 톰이 수상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들고 나오는 칵테일이 바로 진 리키다. 

<이미지 출처 : www.tate.org.uk>

 진은 처음 네덜란드에서 국민 음료라 불리며 유행했는데 네덜란드 지지를 얻어 영국 왕위에 오른 윌리엄 3세가 영국에 보급해 큰 인기를 끌었다. 생산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고 병원균이 득실득실한 런던의 물을 마시는 것보다 안전했다. 18세기 초 불어닥친 진 열풍으로 집 네 채당 진 증류소 한 곳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값싼 독주는 영국 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 ‘엄마를 망치는 물건’이라는 별명이 붙은 진이 하류층에 미치는 악영향은 윌리엄 호가스의 풍자 판화 <진 레인>에 지독히도 잘 묘사되어 있다. 술 취한 여성은 아이를 돌보지 못했다. 자정의 목소리가 커졌고 '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법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신사의 나라' 영국 이야기다. 나락으로 떨어진 진의 위상이 회복된 건 18세기 말 런던에서 등장한 칵테일 덕분이었다. 1920년부터 1933년까지 금주법이 시행된 미국에서 생산하기 쉬운 진은 주류 밀매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칵테일 베이스로 사용되면서 애주가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피츠제럴드도 그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진 리키는 만드는 방법도 간단해 하이볼 글라스에 라임 즙을 짜서 넣고 드라이 진과 라임 주스, 찬 탄산수를 넣으면 끝이다. 데이지의 초대를 받은 날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의 막바지라 개츠비는 진 리키를 단숨에 들이켠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예상할 수 없는 연인의 돌발행동 때문인지 판단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씁쓸하면서도 시원한 칵테일 한잔이 개츠비와 데이지, 톰의 마음을 조금은 느슨하게 해 주었으리라는 점이다. 결국 아무 사고 없이 그날이 끝났으니 말이다. 단 한 사람, 닉만큼은 그 칵테일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심장이 벌렁거렸을 터였다. 비밀의 무게는 무거운 법이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 후 곡물의 전용을 막기 위해 금주법을 제정한다. 하지만 허점은 있었다. 금주법 중이라도 의사의 처방이 있으면 의료용 위스키를 판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증류소와 도매 제약 회사를 소유하면 합법적으로 술을 사고팔 수 있음을 깨달은 형사 변호사 출신 조지 리머스는 이런 방법을 통해 술을 불법으로 판매했다. 악명 높은 위스키 밀매업자였던 그는 막대한 부를 얻지만 1921년 체포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조지 리머스와 피츠제럴드가 한 호텔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는 점이다. 이 만남에서 피츠제럴드는 밀수업자의 허풍 가득한 성격에 매료되었고 제이 개츠비가 탄생하는 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알 카포네를 모델로 삼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개츠비가 밀주를 통해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설정을 보면 이런 소문이 전혀 근거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위대한 개츠비>에는 위스키를 베이스로 사용하는 칵테일이 두 번이나 등장한다. 뉴욕 뒷골목의 권력자 울프심과 만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칵테일, 바로 하이볼(Highball)이다. 

 덥고 끈적끈적한 정오의 레스토랑에서 개츠비는 하이볼을 주문한다. 무더운 날씨에 한 잔 하기에 이만한 칵테일은 없을 테니 적절한 선택이지만,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기에, 그것도 한낮에 대놓고 주문하다니 무척이나 개츠비적이다. 하이볼은 추락하던 일본 위스키를 부활시킨 산토리 하이볼이 200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가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큰 인기를 얻은 칵테일이다. 물론 개츠비도 마실 만큼 이미 오래전부터 즐겨왔던 칵테일이긴 하다. 위스키에 얼음과 함께 소다수(탄산수나 진저엘도 가능)를 넣기만 하면 끝이다. 한 여름에 부담 없이 시원하게 한 잔 마시기에 더할 나위 없는 술이다. 흔히 알고 있는 '위스키소다(Whisky & Soda)'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늘날에는 위스키 종류에 상관없이 소다수를 타서 마시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부드러운 스카치위스키는 향을 극대화하기 위해 물과 함께, 거친 아메리칸 위스키는 소다수와 함께 섞어 마셨다(부드럽다와 거칠다는 품질이 아니라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절정을 향해 갈 무렵에는 민트 줄렙(Mint Julep)이라는 칵테일이 등장한다. 개츠비와 데이지, 닉과 조던 그리고 톰 다섯 사람은 더위 때문에 무작정 외출하자는 데이지의 황당한 제안으로 시내에 나온다. 이 상황이 마땅치 않던 톰은 개츠비와 데이지 두 사람이 사라질까 봐 막무가내로 플라자 호텔로 가자고 제안한다.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인 데이지는 숨이 턱 막히는 더위 때문에 냉수욕을 즐기자고 제안하지만, 정작 호텔 스위트 룸에 들어가자 민트 줄렙을 마시자며 변덕을 부린다. 사실 민트 줄렙은 “문명은 증류와 함께 시작한다”라고 말할 만큼 위스키를 열렬히 옹호했던 노벨상 수상 작가 윌리엄 포크너를 상징하는 칵테일이다. 줄렙이라는 단어는 고대 페르시아어인 'gulab(굴랍)'에서 유래한 것으로 장미꽃잎 향을 낸 물을 말한다. 지중해 지방에서는 자생종인 민트가 장미꽃잎을 대체했는데, 그 음료가 신세계로 와서 버번위스키와 결합해 탄생했다. 포크너는 민트 줄렙을 무척 좋아해 자신만의 제조법을 만들 정도였다. 생전에 포크너가 살던 집인 미시시피주 옥스퍼드의 로인 오크에 타자기로 이 제조법을 기록한 메모가 놓여있다. 줄렙은 텀블러에 잘게 부순 얼음을 채우고 켄터키 주에서 생산하는 버번위스키에 설탕을 넣어 만드는 칵테일이다. 민트의 상쾌함과는 대조적으로 정작 플라자 호텔 스위트 룸은 비극의 시발점이 된다. 개츠비와 톰이 충돌하고, 개츠비와 데이지 사이에 갈등이 극대화되는 공간이다. 톰은 개츠비의 추악함(추문)을 들춰내고, 개츠비는 데이지가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음을 고백하라고 떼를 쓴다. 데이지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개츠비지만, 남편을 한때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사면초가. 파국을 향한 질주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결국 개츠비는 톰의 정부(머틀 윌슨)를 차로 치여 죽였다는 오해를 받고 그녀의 남편(조지 윌슨)에게 죽임을 당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되찾고 싶던 개츠비의 오랜 꿈은 샴페인 거품처럼 사라지고, 불빛을 쫒던 불나방들처럼 파티를 찾던 사람들 중 누구도 개츠비의 장례식에 오지 않는다. 개츠비의 위대함을 진작에 알아챈 닉만이 그를 기억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사실 마지막에 한 명이 조문을 온다. 바로 석 달 전 개츠비의 서재에 꽂힌 장서를 보고 놀라던 올빼미 안경을 쓴 남자였다. 책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의리가 있다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더라도 말하고 싶다. 책을 읽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다고 말이다. 이건 지금의 관점이다.)


 개츠비처럼 피츠제럴드도 허무하게 삶을 마감한다. 겨우 44살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이른 죽음과 폭음에 가까운 음주 습관은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술은 그의 천재성을 더욱 활활 타오르게 했지만, 반대로 육체를 조금씩 죽여나갔다. 그도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술을 마시면 감정이 무르익는다. 나는 술을 마시고 고조된 감정을 이야기에 넣는다. 맨 정신일 때 내가 쓴 이야기는 멍청하기 짝이 없다."라며 술이 창작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육체를 포기하는 대신 술을 통해 위대한 작품을 집필해 불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진실은 오직 피츠제럴드 자신만이 알뿐. 다행히 동시대를 살던 많은 이들이 <위대한 개츠비>를 명작으로 인정했다. 진주는 흙속에 있어도 진주일 테니 말이다. 미국 태생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은 낙담하고 있던 그에게 편지로 이런 말을 전했다. "내가 보기에 이 작품은 헨리 제임스 이후 미국 소설이 내디딘 첫걸음 같아 보이네." 시인의 말대로 이 작품은 현대 미국 소설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오늘날까지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다. 어쩌면 인류가 지속하는 한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한 잔의 버번위스키와 함께.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 해롭다. 술은 모두에게 천재성을 발휘하게 해주는 마법의 액체가 아니다. 기분이 좋을 만큼, 다음 날 상쾌한 아침을 시작할 만큼 마시는 게 적당하다. Drink Responsibly!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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