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 승리와 패배만 있는 게 아니더라
월드컵 가나전을 캔맥주 하나 들고 혼자 응원했다. 아내는 자신이 응원하면 패배하는 징크스가 있다고 애써 경기를 외면했다. 경기 장면에 따라 내가 넣는 추임새를 멀리서 듣고 "골 넣었어?", "골 먹었어?"를 연신 물었다. 우리 대표팀의 승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시청권'을 포기한 아내에게 건배를. 전반 20여분 전까지는 우리 선수들의 움직임이 좋았다. 좋아도 너무 좋아 이러다 3:0으로 이기는 거 아니야 혼자 설레발치기도 했다. 유효슈팅은 없었지만 끝없이 상대 골문을 위협했다. 조직력도 개인 기량도 상대 팀보다 훨씬 뛰어났다. 솔직히 예전(?)에는 우리 선수들이 공을 잡으면 불안했다. '왜 저렇게 오래 가지고 있어, 빨리 패스하지!' 조마조마한 마음이 나도 모르게 쓴소리로 터져 나왔다. 이제는 아니었다. 해외파든 국내파든 상관없이 공을 가지고 놀 줄 알았다. 상대가 위협해도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세계무대에 걸맞은 선수들이 믿음직스러웠다.
전반 20분을 넘기면서 우리 선수들 움직임이 이상했다. 벌써 체력이 떨어질 리는 없었다. 뭔가 호흡이 잘 맞지 않아 보였다. 상대 공격수가 공을 가지고 골대 가까이 와도 수비수가 붙지 않았다. 오프사이드를 유도하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일 터였지만(안정환 해설위원의 지적처럼) 왠지 불안해 보였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거짓말처럼 눈 깜짝할 새 두 골을 먹었다. 골 넣는 장면부터 경기를 관람한 사람은 '월드컵 하이라이트'를 보여준다고 착각할지도 몰랐다. 첫 번째 골은 핸드볼 반칙이 의심됐지만 골로 인정되었다. 상대 플레이가 좋았고 막기 힘든 공이었다. 두 번째 골은 정말 아쉬웠다. 너무 쉽게 먹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르니 저절로 리모컨에 손이 갔다. 예전 같으면 벌써 채널을 돌렸겠지만, 우리 선수들을 믿었다. 쉽게 질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직 경기 시간도 많이 남았다. 포기하기엔 일렀다.
젊은 피 이강인 선수가 투입되면서 경기가 뒤집혔다. 이번에는 우리가 3분 간격으로 두 골을 넣었다. 얼마 전까지 이름도 몰랐던 조규성 선수의 그림 같은 헤더 골이었다. 월드컵 역사상 우리 선수가 한 경기에서 두 골을 넣은 사례는 없었다. 그 멋진 걸 국내파 선수가 해냈다. 역전이 가능해 보였고 실제로도 그럴 뻔했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2:3으로 패했다. 마지막 20분간 가나의 침대 축구를 보자니 열불이 났지만, 피가 터지고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그라운드를 누비는 우리 선수들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표현은 패배한 팀의 변명이자 자기 위안이라고 생각했지만, 가나전은 졌지만 잘 싸운 경기였다. 승패를 떠나 100분간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열정과 투지, 그리고 경기력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경기가 끝나고 조규성 선수와 이강인 선수의 인터뷰를 보았다. 어떤 질문에 답하든 '마지막 경기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멋진 경기로 우리(적어도 나)를 열광하게 해 주었는데도 마치 죄인처럼 응원해 준 국민들께 죄송하다고 연거푸 사과했다. 16강 진출에 실패하면 무슨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주눅 들어 보였다. 물론 우루과이전도 가나전도 응원하는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그래도 축구 때문에 행복한 시간이었다. 패배하면 하늘이 무너질 줄 알았는데 다음 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양은 떠올랐다. 마지막 포르투갈전에서 우리 대표팀이 승리하면 좋겠지만, 설령 패배한다고 해도 선수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최선을 다했고 잘 싸웠지만 상대팀에게 행운이 따라준 것뿐이었다. 그러니 선수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포르투갈전을 즐기라고. 이겨도 좋고 져도 상관없으니 다치지 말고 마음껏 기량을 발휘해 스스로 만족한 플레이를 하라고. 두 차례에 걸친 경기로 모든 걸 증명했으니 여러분 스스로도 세계인의 축제를 즐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축구에는 승리와 패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해 준 대표팀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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