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라면 대토론회
음식 솜씨로 따지자면 대장금도 굽실하며 한 수 배우고 갈 장모님께서 모처럼 손주들 먹일 요량으로, 명절도 아닌데, 맛깔난 갈비찜을 푸짐하게 한 상 차려주셨다. 장모님 손을 거치면 흔하디 흔한 재료들도 언제나 고급진 요리로 변신했다. 매일 먹는 김치콩나물국이나 된장찌개는 말할 것도 없고 보쌈(수육), 고추장 불고기, 생선찜, 그리고 갈비찜까지 모두 임금님 수라상에 올려도 손색없을 만큼 근사했다. 특히 갈비찜은 우리 식구들이 무척 좋아해 명절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음식 중 하나였다. 너무 달지도, 너무 짜지도 않은 환상적인 맛은 밤과 대추 등 각종 재료에 장모님 비법 양념이 한데 섞여 탄생한 신비한 마법의 결과물이었다. 눈꽃빙수처럼 입 안에서 살살 녹는 갈빗살 맛은 두 말하면 잔소리였다. 세상에서 딱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어머니 부침개 찌개와 장모님 갈비찜을 두고 심각하게 고민할 터였다. '아, 장모님이 해주시는 갈비찜 먹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머지않아 명절이 다가온다는 걸 의미했다. 성난 복어처럼 빵빵해진 복부를 퉁퉁 두들기며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 당분간 갈비찜은 안 먹어도 되겠다."라고 말했더니 유난히 고기를 좋아하는 둘째 아이가 "난 내일도 먹을 수 있는데?" 했다. 아무리 맛있어도 같은 음식을 연달아 먹을 수 있다고? 정말 그게 가능해? 아닌 밤중에 열띤 음식 토론이 벌어졌다.
생선회나 고기를 '보통 사람' 수준으로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무리 맛있어도 최소 2주일에서 최대 한 달 정도 시간차가 필요했다. 물론 이틀 연거푸 먹을 수는 있지만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때문인지 처음 먹었을 때 느꼈던 황홀한 매력에는 근접하지 못했다. 똑같은 음식이라도 맛의 차원이 달랐다. 호반의 도시, 춘천 출신으로 먹어도 먹어도 또 먹고 싶은 막국수나 닭갈비도 마찬가지였다. 타향살이하면서 마치 향수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연신 그리웠지만, 일단 한 번 먹고 난 후에는 서너 달은 족히 버틸만했다. 한때 퇴근할 때마다 떡볶이를 사 나른 적도 있었고 치킨도 이틀에 한 번꼴로 배달시켜 먹기도 했지만 그건 사정이 조금 달랐다. 브랜드가 제각각이라 맛이 달랐으니 같은 음식으로 분류할 수 없었다. 둘째 아이를 제외하면 아내와 첫째 아이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봉(감의 종류 중 하나)이 수확 후 가장 달고 맛있는 때를 기다려야 하듯이 분명 음식에도 맛의 정점을 찍는 일정한 순환 주기가 있었다.
이런 자연, 아니 음식의 순환 법칙을 어기는 불청객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라면'이었다. "근데 왜 라면은 오늘 먹어도 내일 또 먹고 싶지?" 했더니 아내와 아이들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라면은 예외였다. 삼시 세끼를 라면으로 때우는 건 불가능했지만, 하루에 한 봉이라면 며칠은 문제없었다. 게다가 요즘 라면 하나 중량은 어찌나 적던지 젓가락질 몇 번이면 봄눈 녹듯이 사라지지 않던가. 항상 라면 한 박스는 기본이고 종류도 무척 다양하게 구비해 놓고 있지만, 아내는 아이들이 어릴 때 인스턴트 음식인 라면을 거의 끓여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라면을 먹는 건 가족 여행 중이거나 캠핑 갔을 때 한해서였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장봉도에 캠핑 가서 컵라면을 처음 먹어 본 둘째의 반응은 마치 유니콘이라도 본 아이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졌더랬다. 어쩌면 그런 제약 때문에 아이들이 라면을 더 좋아하게 된 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라면은 매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임에 틀림없었다.
아빠는 라면을 매일 먹을 수 있는 이유로 MSG의 '감칠맛'을 꼽았다. MSG는 사실 과학적으로 몸에 나쁘다고 증명된 것도 아닌데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다. 미국이나 EU도 MSG를 식품 첨가물이나 안전한 물질로 판단하는데 우리나라만 유독 MSG에 가혹하다고 알은척했다. 4대 맛(신맛, 짠맛, 단맛, 쓴맛)에 이어 5대 맛인 감칠맛을 발견한 건 일본의 이케다 키쿠나에라는 교수였다. 그는 다시마에서 새로운 맛을 내는 물질인 글루타메이트를 추출하였고 이를 '우마미'라고 이름 지었다. 이 우마미가 감칠맛을 내는 원인이었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용해가 가장 잘되고 맛이 좋으며 결정화하기 쉬운 염이 글루타민산소듐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케다 교수는 이를 MSG(Monosodium Glutamate)라 불러 특허를 출원하고, 맛의 정수라는 뜻의 '아지모토'라는 상표를 붙여 생산했다. 베일에 싸여 있던 감칠맛이 과학에 의해 발견돼 산업화된 순간이었다. 그런데 MSG는 물에 녹으면 글루타민산과 소듐으로 분리되었다. 이중 글루타민산은 자연계에 흔한 물질로 모유에도 일정량 함유되어 있다. 우리가 라면을 매일 먹을 수 있는 건 어쩌면 영·유아 시절 먹던 어머니 젖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른다는 게 아빠의 결론이었다. 완벽한 시나리오에 나조차도 깜짝 놀랐다.
아빠를 막아선 건 '오므라이스 잼잼'과 '식객'을 수십 번 완독해 음식에 관해 준 전문가로 활동하는 둘째 아이였다. 아이는 미각까지 남달라 국물만 떠먹어도 재료를 맞추는 기염을 토했다. 가끔은 냄새만으로도 그렇게 해 사람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아이가 라떼 시절 이야기라며, 대부분 라면 제조사들이 2000년대 후반부터 라면 수프에 MSG를 첨가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아차 싶었다. 왜 그런 중요한 사실을 나만 몰랐을까. 아이는 요즘 수프에는 쇠고기감칠맛분, 버섯야채조미분말, 조미육수분말, 설탕, 고춧가루, 양념분말, 육수분말, 간장분말, 향미증진제, 분말캐러멜 등이 들어간다고 알은척했다. 도대체 왜 그런 것까지 알고 있냐고 물었더니 진짜 좋아하면 저절로 알게 된단다. 학교 공부도 좀 좋아하면 안 되겠냐는 질문이 입 밖으로 마구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막았다. 둘째 아이는 라면을 매일 먹을 수 있는 건 꼬불꼬불 쫄깃한 면발과 뭉근한 국물의 완벽한 하모니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둘 중 하나라도 뒤쳐지면 매일 먹고 싶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매운맛 라면을 먹지 못해 '생면식감'을 최애 라면으로 꼽는 아이에게 나름 일리 있는 이유였다. 아빠보다 매운맛을 더 잘 먹어 '불닭볶음면'도 척척 소화하는 첫째 아이는 라면 자체도 중독성이 있지만 함께 먹는 '할머니 김치' 때문이라고 다분히 정치적인 주장을 펼쳤다. 김치 없는 라면은 상상할 수 없으니 제법 설득력 있었다. 가성비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사실 그토록 저렴한 가격으로 한 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라면이 유일할 터였다. 게다가 남은 국물은 식은 밥과도 잘 어울리지 않던가. 서민 음식으로 오랜 시간 사랑받으며 가격 인상에 민감한 품목으로 라면만 한 게 없었다. 연이은 갑론을박에 안 그래도 테너톤 목소리가 카운터테너만큼 치솟았다.
침묵을 지키던 아내가 낮게 깔린 중저음으로 한 마디 하자 시끌벅적하던 차 안이 잠잠해졌다. "뭔 소리야. 맛있으니까 매일 먹을 수 있는 거지. 다른 이유가 뭐가 필요해!" 두 눈을 질끈 감은 아내가 혼잣말로 구시렁댔다. "갈비찜 양껏 못 먹어서 날카로우니까 조용히 가자." 그 순간 미래가 보였다. 밤 열 시를 넘겨 라면을 끓이고 있는 내 모습이. 누군가 위스키가 '액체에 녹아든 햇빛'이라고 극찬했던가. 우리 가족에게 라면은 '면발과 국물에 깃든 달빛'이었다. 역시 라면은 늦은 밤, 사랑하는 이가 끓여줄 때 가장 맛있으니 말이다.
첫째 아이가 좋아하는 오뚜기 진라면(매운맛)의 원재료이다. 이렇게 많은 재료가 들어갔는지 짐작도 못했다. 라면의 세계도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구나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닌 밤중에 라면 대토론회는 제법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아래 출처는 오뚜기 홈페이지)
면:소맥분(밀:미국산,호주산),변성전분,팜유(말레이시아산),감자전분(외국산:덴마크,프랑스,독일 등),글루텐,정제소금,마늘시즈닝,난각분말,유화유지,면류첨가알칼리제(산도조절제),이스트엑기스,육수추출농축액,녹차풍미유,비타민B2
스프류:정제소금,설탕,포도당,복합양념분말,숙성마늘맛분,간장분말,볶음양념분말,육수맛분말,마늘농축조미분,고추맛베이스,로스팅맛분말,쇠고기육수분말,조미육수분말,참맛양념분말,발효복합분,진한감칠맛분,후추분말,칠리맛분말,고춧가루,감칠맛분말,참맛버섯양념분말,버섯야채조미분말,오뚜기참치간장분말,감칠맛베이스,로스팅조미분말,맛베이스,향미증진제,볶음마늘분,육수맛조미분,육수추출농축분말,참맛효모조미분말,숙성양념분말,칠리추출물,구아검,칠리혼합추출물,산도조절제,고추농축소스,조미쇠고기맛후레이크,건당근,건청경채,건파,건표고버섯,건고추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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