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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니체보다 신영복

새해 첫날을 맞이해, 처음처럼

by 조이홍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몇 번 읽어도 난해한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문장이다. '가벼움과 무거움'을 설명하기 위해 쿤데라는 하필 니체를 소환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끝에 와서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재귀할 뿐이다. 그것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라며 시간은 영원히 회귀한다고 주장했다. 쿤데라는 이를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이 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라고 풀이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 삶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우며 또 의미로 가득한데…. 쿤데라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다. 기왕이면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면 어때서.


우리는 각자의 나이만큼 헌 해를 보냈고 또 새해를 맞이했다. 12월 31일의 태양과 1월 1일의 태양이 다르지 않을진대, 1월 1일 처음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기 위해 끝없이 늘어선 자동차 헤드라이트 대열에 합류해 동해바다로 질주한다. 인간은 실체가 없는 시간을 숫자라는 프레임에 가둬 2022, 2023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우리에게로 와서 '꽃'이 되게 했다. 해마다 엄청난 교통 체증에 시달리며 내년에는 이까짓 매일 뜨는 해 보러 오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여지없이 12월 31일 동해바다로 뻗은 고속도로를 달린다. 반복 또 반복.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 니체의 주장대로라면 어쩌면 우리는 무수히 많은 새해를 맞이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이길래.


뉴턴은 “수학적이며 진리적인 절대시간은 외부의 그 어떤 것과 상관없이 그것 자체로 흐른다.”라고 말했다. 시간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반면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지니고 있는 '인식의 형식'으로 보았다. 이 형식은 인간의 주관적인 의식이 만들어낸 도구일 뿐, 물리계에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발 더 나가 프랑스 유심론의 전통을 계승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지속으로서의 시간, 의식으로서의 시간은 자아가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진짜 시간이지만, 체험이 배제된 기계적 시간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내가 경험하는 시간만이 진짜라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시간성에서 찾는다. 인간은 시간성으로 존재하며, 인간 실존은 근본적으로 시간적이라는 것이다. "시간성이란, 있어 오면서 (과거), 마주하면서 (현재), 다가감(미래)이다.” 휴, 이제 시간이 무엇인지 좀 알 것 같다. 감 잡았어!


시간은 시각과 시각 사이의 간격 또는 그 단위를 가리키는 용어를 말한다. 물리량으로서 객관적으로 정해지고 단위로서는 '초'를 사용하며 실용단위로서 분(1분=60초), 시간(1시간=60분)을 사용한다. 시간 단위는 오랫동안 사건들 사이의 간격과 그 지속 기간에 대한 '양(실체)'으로 생각되었다. 정확히 반복되어 일어나는 사건이 물리법칙에 의하여 보증되는 자연현상이 존재한다면, 그 현상이 되풀이되는 주기를 정함으로써 물리적 시간이 정해진다. 태양의 육안 운동, 달이 차고 기우는 변화, 진자의 진동처럼 명백하게 주기적으로 운동하는 물체들을 시간 단위에 대한 표준으로 사용해 왔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융의 동시성 이론 등이 논의되면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시간의 의미는 변질되었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운동 상태와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개체들에게 ‘동시’란 모두 다르게 '관측'된다. 한편 융은 정신을 시공간 안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보았다. 인간의 무의식은 현존하는 시공간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어, 아까 잡은 '감'이 사라졌다. 그래서 시간이란 도대체 뭐냐고.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직선으로 흘러갈까? MCU에는 '멀티 버스'가 존재하고 직선으로만 존재하는 시간에 균열이 생겨 여러 가지 갈래길이 생기곤 하지만, 현실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간다. 벤자민 버튼에게 시간은 거꾸로 흘러가지만 우리에게 시간은 거꾸로 흐를 수 없다.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의 증가 때문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엔트로피가 증가함에 따라 시공간의 에너지 분포가 변하게 되면 그 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며 커지는 쪽이 자동으로 시간이 흘러가는 미래가 된다. 이렇게 나타나는 시간의 방향성을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이라 하는데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방향성은 항상 열역학적 시간의 방향성과 같다. 영원한 회귀를 주장하던 니체가 틀렸다. 아니면 아직 현대 물리학이 증명하지 못하는지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어김없이 새해가 밝았다. 2022는 과거가 되었고, 2023이 주인공이 되었다. 새해 계획을 세우고 몇 가지 다짐을 하다 문득 '시간'이란 무엇인지 궁금했다. 물리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같은 개념으로 본다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내 작은 뇌는 약간의 이해도 허락하지 않았다. 위키백과를 뒤져보고 유튜브를 찾아봐도 뭔가 개운치가 않다. 국어사전에 정의된 시간(時間)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 머무름이 없이 일정한 빠르기로 무한히 연속되는 흐름'이라고 나온다. 일정한 빠르기라지만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는 않다. 또한 무한히 연속된다는데, 도도한 흐름의 과정 중 극히 일부에 속해 있는 미물인 인간이 어떻게 무한히 흐른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시간에 다가갈수록 시간은 자꾸 멀리 달아났다. 어쩌면 나는 시간이 궁금한 게 아니라 2022와 다른 삶을 살아갈 2023의 다른 나를 이끌어낼 전환점이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아, 그래서 사람들이 동해바다로 가는 걸까?


그래서 '영원한 회귀'를 꿈꾸는 니체보다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신영복 선생님을 존경한다. 새해의 첫날, 신영복 선생님 문장으로 시간이 어지럽힌 머리를 소풍 보냈다. '처음'이라는 말은 언제나 설레니까. 올해도 애써 잘 살아야 하니까.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소주 PPL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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