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게임만 하는, 온종일 스마트폰만 붙들고 있는, 혹은 공부만 하는 우리 아이 겨울 방학에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고민하는 분들께 책 몇 권 소개할까 합니다. 사실 방학 때마다 아이들에게 '방학 도서 목록'을 지정해 주고 서점과 도서관에서 열심히 책을 날라주었지만, 완독률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부모가 '읽어야 할 책'을 골라 주는 것과 아이들이 '읽고 싶은 책(정말 이런 책이 존재한다면 말이죠…)' 사이에 갭이 존재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래서 이번 겨울 방학에는 일방적으로 책을 지정해 주지 않고 아이들이 원하는 책으로 목록을 최소화했습니다. 과연 스스로 정한 책은 열심히 읽을까요? 적어도 지금 소개할 책은 그렇습니다. 아주 흥미롭게 읽더라고요. 과연 어떤 책이길래….
첫 번째 책은 일러스트레이터 백대승 작가가 그린 그래픽 노블 <동물농장>입니다. 네, 만화입니다. 아이가 읽기 전에 먼저 읽었는데 조지 오웰의 원작에 충실하면서 아이들도 흥미를 잃지 않을 탄탄한 구성과 수준 높은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소위 '아이용' 도서들은 원작을 아이들이 읽기 쉽도록 축약하지만, 이 작품은 내용뿐만 아니라 원작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옮겨온 수준 높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조금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고전 읽으라면 질색하는 둘째 아이가 무려 세 번이나 완독 하는 기적을 보였습니다.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이 아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을 위해 고전을 만화로 변형한다면 이 책이 훌륭한 모범이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이미 원작울 서너 번이나 읽은 저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두 번째 책은 기발한 상상력으로 독자를 홀리는 일본 아동·청소년 문학 작가이자 소설가 이시카와 히로시카의 <무엇이든 빌려 드립니다 외모 대여점>입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해 빌려왔는데 아이가 좋아하더군요. '하루 동안 원하는 외모를 빌릴 수 있다면?'이란 상상력에서 시작된 <무엇이든 빌려 드립니다 외모 대여점>은 세상 착한 점장 안지(여우술사)와 개성과 매력 넘치는 변신 여우 네 명, 아니 네 마리가 외모를 빌려주고 손님의 고민을 풀어주는 마법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들은 외모만 빌려줄 뿐, 해결책은 각자의 마음에 담겨 있었죠. 바뀐 외모는 그 마음의 빗장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뻔한 클리셰가 한 다발이긴 하지만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정작 원하는 외모를 갖게 된 손님들이 깨닫는 과정을 담아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민이나 문제를 '현재 자신의 모습'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도움이 될만한 외모'로 변신해 해결하고자 합니다. 추앙받고 싶어 ‘미소녀’의 외모를 대여하는 10대 소녀, 평범한 외모 때문에 받은 상처를 복수하기 위해 ‘팜므파탈 같은 미인’으로 변신하는 20대 직장인. 그리고 은따 당하는(사실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죠) 직장 동료를 도와주기 위해 '남의 말을 잘 들어줄 것 같은 여성'의 외모를 대여하는 직장(심지어 남자) 상사 등 주위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하루 동안 바뀐 외모로 살아가는 이들은 정작 '외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정말 중요한 건 '진실한 마음'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한창 외모에 관심 갖는 아이가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소설이겠죠? 이야기 전개도 빠르고 각각 다른 에피소드가 재미를 더해줍니다. 아이가 재미있어할 만한 책을 쿨하게 "자, 읽어 봐!" 하며 건네주는 멋진 부모님이 될 절호의 기회입니다.
세 번째 책은 믿고 보는 안녕달의 신작 <겨울 이불>입니다. 라틴 아메리카에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안녕달'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보통의 일상을 몽환적인 판타지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작가의 상상력은 언제나 독특한 매력으로 독자를 매료시킵니다. 이번 신작은 <수박 수영장>이나 <할머니의 여름휴가>에 버금가는 흥미진진한 작품입니다. 그림책 큐레이터인 아내가 '2023년 최고의 그림책'으로 벌써 찜 해놓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시골집, 너른 아랫목에 깔린 두툼한 이불 너머에는 '환상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 이불을 헤집고 들어가면 후끈한 찜질방이 나옵니다. 그곳에서는 인상 좋은 곰이 식혜와 달걀을 팝니다. 그런데 찜질방 안에서 여름날 뛰놀던 골목길이 나오는가 하면, 썰매를 타던 강가로 변하기도 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판타지로 눈이 즐겁습니다. 초라한 시골집 작은 방에 깔린 이불이 작가의 상상력으로 최고의 놀이터가 됩니다. 우리도 어렸을 적에 한 번쯤 해봄직한 놀이입니다. "뜨끈한 온돌 방바닥에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차가운 식혜를 마시는 기분으로 이 책을 봐주세요."라는 작가의 말처럼 시골 할머니댁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누워서 읽으면 딱 좋은 그림책입니다. 작가의 전작들처럼 '가족 간의 사랑'도 빠지지 않죠. 그림책은 유치원생이나 보는 '유치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첫째 아이도 <겨울 이불>은 오랜만에 푹 빠져 읽었답니다.
마지막 책은 소셜 빅데이터를 통해 인간의 마음을 읽고 해석하는 일을 20년 가까이 해온 송길영 교수의 <그냥 하지 말라 - 당신의 모든 것이 메시지다>입니다. 네, 이건 아이들이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오롯이 부모 추천 도서입니다. 올해 고등학생이 되는 아이가 읽으면 좋겠다 싶어 목록에 넣었습니다. 이 책은 삶이라는 긴 여정에서 다음 스테이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수험생이나 취준생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현재 중, 고등학생들도 읽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이 '100세 시대'에 생애 주기별로 자신의 앞날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뼈 때리는 팁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몇 번의 작은 성공을 경험한 기성세대는 별로 걱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성세대들이 만든 프레임 안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욕심이나 게으름 때문에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코로나가 앞당긴 미래 사회, 인공지능과 기후변화가 초래할 새로운 환경에서 과연 인간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요? 과거의 성공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면 미래에도 성공할 수 있을까요? 소셜 데이터는 말합니다. "아니요!"라고요. 코로나 때문이지만 이제 기업들은 '재택근무'의 달콤함을 알아버렸습니다. 누가 일을 하고, 누가 일을 하지 않는지도 과정의 투명성을 통해 다 알게 되었고요. 더 이상 '월급 루팡'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여전히 입시와 취업이라는 오래된 관습만 고집합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새로운 시대에 성공하기 위해, 아니 살아남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요? <그냥 하지 말라>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욕심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했지만 이번 겨울 방학에는 아이들 도서 목록을 현실적으로 구성해 보았습니다. 저는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인간의 읽는 능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문해력은 호모사피엔스의 가장 중요한 후천적 성취 가운데 하나라는 거죠. 거의 모든 문화가 디지털화하는 과정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어쩌면 책과 스크린(모니터)을 모두 경험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 아이들이 제 나이가 되면, 아이들의 아이들은 '할아버지 책이 뭐예요?'라고 물어볼지도 모르죠. 그럼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줘야겠습니다. "옛날 옛날에 말이야 호랑이 금연하던 시절에 책이라는 게 있었는데, 신기하게 글자만 읽어도 영화 한 편이 머릿속에 흘러가는 거 있지…"라고 말이죠. '비유'와 '추론', 그리고 '상상력'은 책을 읽는 사람만이 누리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디지털 시대에는 어쩌면 불가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