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선은 넘지 마오> 첫 번째 편지
유난히 포근한 겨울 어느 날이었지. 그날따라 당신은 무척 기분 좋아 보였어. 무슨 일일까 궁금했지. 언제나 밝고 쾌활한 당신이었지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날은 많지 않았거든. 당신이 기분 좋으니까 아이들도 덩달아 즐거워 보였어. 우당탕탕 크고 작은 소요가 끊이지 않던 집에 모처럼 웃음꽃이 만개했으니 나도 괜히 기분 좋더라. '그래, 이런 게 사는 거지. 인생이 뭐 별 건가.' 싶더라고.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켠이 불안했어. 기시감 같은 게 일기도 했고. 설마 그건 아니길 바랐지. 웬걸.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더라. 인생이란 참, 브라보, 브라보 박연진, 아니 my life!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당신이 말했지. 인스타그램에서 정말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일품요리'를 봐 두었다고. 오늘 저녁을 기대하라고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야단법석을 떨었지. 둘째 녀석은 우리 엄마 최고라고 너스레를 떨더라. 이번 주말에는 반드시 게임하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이더라. 참 애쓰면서 사네, 우리 둘째. 그런데 나는 보고야 말았어. 입은 웃고 있는데 눈동자는 격하게 흔들리는 아이들을, 허공에서 길을 잃은 눈빛을 말이야. 그동안 부단히 노력했던 아버지의 '사회화 학습' 덕분에 녀석들은 제법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지만, 여전히 그 눈빛만은 사회화되지 않았더라. 어찌나 올곧던지. 그래도 당신이 눈치채지 못하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참 짠하더라. 우리 아이들이 다 컸지 뭐야.
그런데 사람이란 참 이상해. 매번 실망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니 말이야. 어쩌면 정말 망각이란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당신이 맛보게 해 줄 요리에 잔뜩 기대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더라고. 하긴 난 오래전에 사랑을 얻고 미각을 잃었으니 어떤 음식이라도 상관없었어. 당신이 해 준 음식이라면 고든 램지나 이연복 셰프가 정성을 다해 만든 요리보다 맛있게 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거든. 지난 20년 동안 숱하게 시도한 음식의 잔해들, 요리한 당신조차 입대지 못했던 그 음식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오직 신만이 아실 테지만, 어쨌든 난 아직도 이렇게 건강하잖아. 그거면 됐어. 콜록콜록. 왜 하필 이 순간에 기침이 나오는지. 어디 아프지도 않은데 말이야.
식사 준비를 끝낸 당신은 인간에게 가장 기분 좋게 들린다는 '솔음'으로 우리를 불러냈어.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식탁에 앉은 세 남자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지. 식탁 한가운데 자리 잡은 노랗고 고운 #두부계란부침 때문이었어. 마치 음식점 앞에 진열해 놓은 모형 음식처럼 어찌나 예쁘던지. 소담하게 차려낸 음식 앞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라고. 아이들도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감동하더라. 젓가락질하기에도 아까운 요리 앞에서 당신은 많이 만들었으니 실컷 먹으라고 한껏 북돋아주었어. 잠시나마 당신의 요리 실력을 의심했던 나 자신이 미워지더라. 어떻게 감히 당신을 부정할 수 있었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물론 마음으로, 두부계란부침 하나를 집어 맛을 보았어. 그 순간 문득 질문 하나가 떠올랐어. 두부는 그냥 먹어도 맛있고 어떤 요리와도 잘 어울리고, 계란 역시 웬만하면 맛없기 힘든 재료인데, 이 두 가지 환상의 재료로 만든 요리에서 어떻게 아무 맛도 나지 않을까 하는 근원적인 궁금증 말이야. 정말 마법 같았어, 흑마법이었지만….
시선이 아이들에게 닿은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어. 역시 사람 입맛은 거기서 거기더라. 각자 앞 접시로 가져간 두부계란부침이 한겨울 응달에 쌓인 눈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더라고. 아이들이 사회화로 연기력은 몰라 보게 늘었지만 입맛은 변하지 않았나 봐. 아비의 부덕의 소치일 뿐, 어찌 아이들을 나무라겠어. 그래도 당신이 시도한 새로운 요리 덕분에 식사하는 동안 아이들이 나물이 맛있는 반찬이란 걸 새삼 깨달았으니 그 도전이 헛되지는 않았지 뭐야. 게다가 나 역시 깨달았어. 모든 일에는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도,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말이야. 어쩌면 당신의 진짜 큰 그림은 이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하해와 같은 당신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어. 그저 보고 듣고 느끼뿐.
나는 알아. 당신이 지난 몇 년 동안 요리 장인으로 거듭났다는 걸 말이야. 당신은 카레를 잘 만들고, 하이라이스를 잘 만들고…, 그러니까 카레를 잘 만들고 하이라이스도 잘 만들고 국도 환상적으로 끓이잖아. 배춧국과 소고기뭇국은 내다 팔아도 될 것 같다는 칭찬 기억하지? 진심이었어, 정말 최고잖아. 우리는 그거면 충분해. 우리들 중 누가 당신의 레시피가 궁하니 새로운 요리 좀 개발하라고 하던가? 그런 녀석이 있다면 내가 혼쭐을 내줄 테니 이제 #요리스타그램은 그만 뒤적거리는 걸로 하자. 사실 그곳에는 화려한 이미지만 있을 뿐 맛은 표현되지 않잖아. 그동안 시도했던 #요리스타그램의 음식들은 원래 그런 거야. 보기에만 좋고, 맛은 없는. 그렇지 않다면 당신 같은 요리 장인이 맛을 구현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그러니 부디 새로운 음식을 공부하기 위한 용도로 인스타그램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해. 그래줄 수 있지?
냉장고로 직행한 고운 색시 같은 두부계란부침은 일주일 동안이나 맥주 안주가 되어 주었어. 정말 많이도 만들었더라. 덕분에 오뚜기와 CJ에 새삼 고마움을 느꼈지 뭐야. 케첩과 돈가스 소스를 판매해 주어서 어찌나 고맙던지. 당신도 알다시피 케첩이나 돈가스 소스를 좋아하지 않던 내가 그만 그 맛을 알아버렸지 뭐야. 이것도 긍정적인 면인가. 잘 모르겠네. 당신은 그림도 그려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니까 그깟 요리에 스트레스받지 마. 잘하는 걸 더 잘하면 되잖아. 굳이 못하는 걸 해내려고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어. 내 마음 알지? (2023년 1월 30일. 미각을 잃고 사랑을 얻은 남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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