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PPL의 명과 암
PPL(Product Placement)은 기업의 지원(물품 협찬이나 제작비 지원)을 대가로 영화나 드라마에 해당 기업의 브랜드(제품)를 소품으로 배치하는 광고기법을 말한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제작비를 일부 충당하거나 소품을 무상으로 지원받을 수 있고, 기업 입장에서는 영화나 드라마 장면 속에 자연스럽게 노출해 시청자 또는 관객(소비자)의 무의식 속에 자사 브랜드를 긍정적으로 각인시키고 궁극적으로 매출을 증가시킬 수 있다. 너무 과한(빈번한) 노출로 시청자의 눈살을 종종 찌푸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PPL은 기업과 제작자 모두 'Win-Win' 할 수 있는 매력적인 광고 기법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모든 브랜드가 '별에서 온 그대'처럼 PPL을 통해 '대박'을 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광고비는 광고비대로 지출하고 브랜드 이미지는 추락하거나 부정적으로 비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드라마나 영화에 '술 음용 장면'이 클리셰처럼 자주 등장하기에 위스키 제품의 PPL은 항상 조심스럽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 파트 2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흥행몰이를 하면서 '손명오 위스키' 역시 화제가 되고 있다. 이번에는 위스키 PPL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위스키&스피릿 회사의 마케팅팀에서 브랜드 매니저(BM)로 일하면 하루에도 영화나 드라마 시놉시스를 서너 편 이상 받는다. 대부분 PPL 협찬 제안서다. 한때 영화감독을 꿈꾸었던 이로서 받은 시놉시스를 한 편 한 편 꼼꼼하게 살폈다. 보통 PPL 협찬 제안서는 영화사에서 직접 보내거나 PPL 전문 대행사를 통하는데 어떤 경우든 브랜드 매니저 입장과 간격이 너무 컸다. 영화사나 대행사 입장에서는 어떤 장면이든 해당 브랜드가 얼마나 자주, 오래 노출되는지에 집중했다. 반면 브랜드 매니저는 한 장면만 나오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관객(소비자)에게 보일지가 더 중요했다. 아무리 내용면에서 완성도가 높고 초호화 캐스팅으로 흥행 조짐이 보이더라도 브랜드가 부정적인 장면에서 노출된다면 굳이 PPL을 진행할 까닭이 없다. 오히려 제발 우리 브랜드는 사용하지 말라고 머리 숙여 부탁해야만 했다. 당시 받았던 PPL 제안서는 한결같이 음침하고 폭력적이고 불법을 일삼는 장면에서 우리 브랜드를 노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현실에서 위스키를 그런 상황에서만 음용하는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화에서까지 그런 장면에 자기 브랜드를 노출하고 싶은 브랜드 매니저는 없을 터였다. 상표에 나와 있는 작은 글자까지 읽을 수 있게 줌인해 주어도 그런 장면에 나온다면 도시락 싸들고 말리러 다녀야 할 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동건이 주연으로 출연한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임페리얼 19 퀀텀'을 노출시킨 것은 최고의 PPL이라 할만했다. '사랑과 이별, 성공과 좌절을 경험하고 세상 어떤 일에도 미혹되지 않는 불혹을 넘긴 꽃중년 남자 4명이 펼치는 로맨틱 멜로드라마'를 표방한 <신사의 품격>은 화려한 캐스팅과 탄탄한 연출, 스타 작가라는 요소를 골고루 갖춰 24.4%라는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극 중에서 꽃중년 4인방의 아지트로 모던하고 고급스러운 바(Bar)가 자주 등장했는데 그곳에서 주인공들이 즐겨 마시는 위스키로 임페리얼 19 퀀텀이 사용되었다. 드라마 흥행과 함께 '장동건 위스키'로 포털 사이트를 도배(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반응은 굉장했다)하며, 매출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적지 않은 비용을 제작비로 지원했지만, 정말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더구나 '로컬 위스키'하면 떠오르는 부정적인 이미지(부어라, 마셔라 하는…)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었다. <신사의 품격>에 자연스럽게 노출된 덕분에 임페리얼 19 퀀텀은 성공한 40대들이 우정을 나누며 마시는 모던한 위스키로 소비자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위스키 PPL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였다.
'최고의 찬사'라고 불리는 로얄 살루트는 럭셔리 위스키의 끝판왕이다. 숙성 연도가 제일 어린 제품이 21년이니 더 이상 설명하면 입만 아플 뿐이다. 이 제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이전 글 <여왕과 위스키와 나>를 읽어도 좋겠다. 아무튼 지금은 로얄 살루트 21년 이외에도 21년 몰트, 21년 블렌디드 그레인, 30년, 38년, 그리고 62 건 살루트까지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지만, '라떼'는 21년과 여왕 즉위 50주년을 기념하는 한정판 50년이 유일했다. 명품 매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하얀 면장갑을 끼고 자사 제품을 소중히 다루는 것처럼 내게 로얄 살루트가 그랬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정말 애지중지했다. 현악 4중주와 함께한 'The Ultimate Recital'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최고의 위스키 테이스팅 클래스였다.
우리나라에서 로얄 살루트는 조니워커 블루와 함께 '회장님 위스키'로 통한다. 굳이 최고를 따지자면 두 말할 것도 없이 로얄 살루트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재벌가 회장님들이 마시는 위스키가 무엇인지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런 장면에서 열에 예닐곱은 여지없이 로얄 살루트를 마신다. 유리병이 아니라 세라믹 도자기병이라는 것도 한몫 거들었다. 사실 로얄 살루트는 빈병조차 중고거래될 만큼 구하기 어렵다. 스코틀랜드에서 완제품을 수입하기 때문에 공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호텔 담당 영업사원에게 부탁해 정기적으로 공병을 회수해 방송국에 보내는 게 일인 시절도 있었다. 워낙 비싼 제품이라 물품 협찬도 쉽지 않아 잔꾀를 부렸더랬다. 그 덕분에 재벌가 회장님이 사업상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가족 모임, 사장단 모임 장면에서 로얄 살루트가 자주 등장했다. 아직 PPL이 자리 잡기 전이라 알음알음으로 드라마나 영화에 제품을 노출하곤 했다.
럭셔리 위스키 끝판왕이라는 유명세 때문에 로얄 살루트는 PPL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영화나 드라마에 노출되었다. 돈 들여 PPL 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었다. 조승우와 이병헌이 함께 출연한 <내부자들>에서 검사 역할을 맡은 조승우가 내부 고발을 위해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위스키가 로얄 살루트였다. 극 중 밤의 제왕들이 질펀하게 즐기는 장면에서 등장했기에 BM 입장에서 그리 반가운 노출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장면도 넷플릭스 화제작 <더 글로리 파트 2>에 비하면 순한 맛에 속했다. 다른 위스키도 아니고 라인업 중에 넘버 2, 로얄 살루트 38년 '운명의 돌(Stone of Destiny)'을 사람 죽이는 흉기로 사용했으니 말이다. 드라마 내용에 흠뻑 빠져 보다가 해당 장면을 보고 덜컥 걱정이 앞섰다. 와, 이거 난리 나겠네. 로얄 살루트 담당자 어떻게 하지!
스코틀랜드 왕과 여왕의 대관식에 사용되었고, 새롭게 즉위하는 군주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물로 사용되는 ‘운명의 돌(Stone of Destiny)’에서 영감을 받아 38년 이상 숙성 원액만 블렌딩 한 로얄 살루트 38년은 풍부한 맛과 상징성으로 존경을 표하는 최고의 선물로 자리매김하는 제품이다. 로얄 살루트 라인업에서 40년 이상 숙성된 위스키 원액으로만 블렌딩 한 ‘62 건 살루트’ 다음 제품이 바로 38년 운명의 돌이다. 바로 이 제품이 '손명오 위스키'로 불리며 한창 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제작사에서 PPL을 제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BM은 단호히 거절 했으리라. 자신이 담당하는 제품이 살인 무기로 사용된다는데 제품을 협찬하거나 제작비를 지원할 리 없다. 더구나 엄격한 회사 규정에도 위배되기에 고민할 문제도 아닐 터였다. 제작사는 자체적으로 제품을 구해 소품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드라마는 엄청나게 흥행하고, 로얄 살루트 38년 역시 주목받고 있다. 맛이나 품질, 브랜드에 녹아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도 죽일 수 있는 단단함으로 말이다. 이쯤 되면 긴급 임원 회의가 소집되고, 글로벌 본사에서도 연락이 올만하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아마도 BM은 밤잠을 설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로얄 살루트 38년의 단단함이 주목받지 않기를 바라며, 한편으로 드라마 제작사를 원망하면서 말이다. 왜 하필 로얄 살루트 38년이어야 했는지….
요즘은 그런 이미지가 많이 약해졌지만, 한 동안 시바스 리갈은 '대통령 위스키'로 불렸다. 정치적 견해를 떠나 BM 입장에서 반가울 리 없었다. 시바스 리갈이 젊고 모던한 브랜드 이미지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브랜드 슬로건으로 'Seize the moment', 곧 '현실에 충실해라' 또는 '현재를 즐겨라'라고 외쳤는데 70년대 대통령이 마시던 술이라는 이미지가 현재의 시바스 리갈에 도움 될 턱이 없었다. 시바스 리갈을 담당할 때에는 주로 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PPL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 광고에서는 세련된 젊은 남녀가 시바스 리갈을 기분 좋게 마시고 있는데, 70년대 영화에 제품을 노출하라는 건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과 조금도 맞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영화사 마케팅 담당자에게 하나하나 설명할 때마다 절실하게 깨달았다. 두 집단의 이해차가 서울과 부산 거리만큼 멀다는 걸 말이다. 최소한 PPL을 제안하는 브랜드가 어떤 광고를 하는지, 어떤 이미지를 가지려고 하는지 한 번쯤 확인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주요 장면에 등장한다던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는 PPL을 성사시키기 어렵다. 다른 브랜드도 비슷할 테지만, 위스키는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술이 갖는 이미지가 워낙 상반되기 때문이다.
최근 성공한 PPL 사례를 보면 자주 노출하는 것을 떠나 영화나 드라마 내용에 자연스럽게 섞이는 추세다.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와, 저렇게도 PPL 할 수 있구나'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게다가 PPL이 예능 프로그램까지 진출해 신박한 방법으로 노출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꼭 저렇게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억지로 끼워 넣는 PPL도 자주 눈에 띈다. 회사나 BM 입장에서는 속이 타들어갈 만한 상황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돈까지 써가면서 말이다. PPL이 아닌, 제작사에서 자체적으로 제품을 구해 소품으로 사용할 때는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주면 좋겠다. 이 장면으로 피해 보는 회사(브랜드)가 있을지 말이다. 어쩌면 괜한 걱정이거나 오지랖일지도 모르지만, 담당자는 정말 숱하게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다. 브랜드 이미지를 쌓아 올리는 일은 어렵고 오래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다. 지난 50여 년간 로얄 살루트가 '최고의 찬사'라는 이미지를 얻기 위해 들인 노력은 미처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시바스 리갈이 모던하고 현대적인 이미지로 소비자들의 마음에 자리 잡기 위해 들인 노력도 만만치 않다. 브랜드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