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애호가를 위한 꿀팁 대방출
'여왕과 위스키와 나'라는 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로얄 살루트 50년' 한 병당 출고 가격은 1,200만 원이었다. 이 술을 소비자에게 판매한 호텔이나 백화점에서는 이보다 훨씬 고가였다. 요즘에는 더 비싼 위스키도 많아졌지만, 20년 전 한 병에 1,200만 원짜리 위스키라고 하면 다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술 한 병 값이 소형차 한 대 값보다 비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금도 샷 글라스에 로얄 살루트 50년을 따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 인생에 그토록 두 손을 벌벌 떨었던 적이 있었던가. 장인어른께 어여쁜 신부 손을 전해 받을 때에도 그렇게 사시나무 떨듯 떨지 않았더랬다(인생에서 두 번째로 심각하게 떨긴 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숙성 연도가 오래될수록 왜 위스키는 비싸질까?
숙성 연도와 가격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전에 먼저 '숙성'에 대해 조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숙성이란 간단히 말해 위스키를 참나무로 만든 오크통에 보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위스키 빛깔의 전부, 맛의 절반 가량이 바로 숙성 과정에서 나온다. 19세기 중엽 이전까지 판매, 유통되던 스카치위스키는 대체로 증류기에서 바로 꺼낸 65~70도짜리 알코올이었다. '위스키'라고 하면 금방 떠오르는 이미지, 즉 영롱한 호박(amber) 빛깔이 아니라 보드카나 진처럼 투명한 액체에 불과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위스키를 오크통에서 숙성한 것은 19세기 중엽이었는데 정부의 과도한 세금을 피해 산속에서 이동이 간편한 작은 증류기로 밀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러한 우연 덕분에 비로소 위스키는 '액체에 녹아든 햇빛'이라는 찬사에 어울리는 품격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위스키를 셰리와인이나 포트와인 같은 와인을 숙성했던 나무통에 보관하면 더 부드러워지고 다양한 풍미를 갖추게 된다는 사실은 훨씬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굳이 숙성할 필요가 없었다. 값도 싸고 알코올 도수도 높은 증류주가 대중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없어서 못 파는데 굳이? '위스키의 전성시대'였다.
참나무로 만든 오크통을 주로 사용하는 이유는 참나무가 지닌 장점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참나무가 갖는 방수 성질이다. '전충제'라고 불리는 참나무의 세포 구조는 액체는 통과시키지 않지만, 공기나 알코올이나 수증기 같은 기체는 통과시킨다. 숙성 창고에 보관한 오크통이 '숨을 쉰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겉에서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을 자는 동안 위스키는 어쩌면 한 마리 나비가 되는 꿈을 꾸는지도 모른다. 꿈꾸는 시간 동안 위스키 원액은 나무 틈새 공간에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스며들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다. 오크통 자체도 향미로 가득하지만, 숙성 과정에서 훨씬 다양한 화학적 화합물을 만들어내는 건 안쪽을 검게 그을렸기 때문이다. 오크통 내부가 '숯' 역할을 하는 셈이다. 처음 몇 달 동안에는 나무 재질에서 많은 색을 끌어낸다. 위스키 빛깔은 오크통을 만든 목재에서 나오기도 하고, 열처리된(숯) 부분에서 나오기도 한다. 맛과 향은 나무에서 나온다. 알코올이 숯과 접촉하면서 다양한 화학반응이 일어나 풍미가 만들어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목재의 다양한 폴리머(헤미셀룰로오스, 리그닌 등), 목재 속의 산과 에스테르, 퓨젤 오일이라고 부르는 고급 알코올 등 200여 가지 이상의 화합물이 생성된다. 위스키를 제조할 때 전혀 사용하지 않는 재료, 예를 들어 과일, 초콜릿, 견과류 등의 풍미가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화합물 덕분이다. 1+1=2가 아니라 100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참나무의 특성 때문에 증발에 따른 손실이 불가피하다. 오크통이 액체를 통과시키지는 못해도 기체는 통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위스키는 오크통에 오래 담겨 있을수록 더 많이 증발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년에 약 2% 정도의 위스키가 증발되어 사라진다. 우리가 한 번쯤 들어본 '천사의 몫'이다. 이름은 참 아름답지만, 사실 위스키 제조사 입장에서는 공중으로 위스키, 즉 돈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너무나 아깝지만 어쩌겠는가, 이 뼈아픈 과정을 겪어야 비로소 진정한 위스키가 만들어지니 말이다. 숙성은 과학의 영역에 있던 위스키를 예술의 영역으로 이끄는 중요한 과정이다. 만약 20년을 숙성한 위스키라면 대략 1/3 정도가 숙성 도중 증발한다. 그러니 50년을 숙성했다면 과연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원액으로 꽉 찼던 오크통이 아주 일부, 소량만 남게 된다. 기업이 제품 가격을 결정하는 요소는 다양할 테지만, '원액의 희소성' 차원에서 숙성 연도가 오래될수록 비싸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대만에서 생산되는 '카발란'이나 인도에 있는 암룻 증류소, 람푸르 증류소의 경우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매해 위스키 원액의 10% 이상을 증발로 잃는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생산하는 위스키는 스카치위스키처럼 오래 숙성할 수 없다. 나름의 노하우로 최대한의 위스키 풍미를 끌어냈다는데 아직 마셔보지 못해 그 맛이 무척 궁금하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무연산(Non age stagement) 위스키가 각광받는 이유는 숙성 원액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솔직히 오크통은 비싸고 숙성 창고는 엄청나게 넓어야 한다. 고정 비용이 부담될 수밖에 없다. 경제적인 가치를 고려했을 때 '숙성 이대로 좋은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최근 일부 증류소들은 숙성 과정을 앞당기려는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오크통 가열, 산소 버블 통과, 초음파로 휘저어 섞기 등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음파 교반'이라고 하여 위스키를 진동시키기도 하고 특정 화학 물질을 제거하거나 다른 물질의 농도를 조절하기도 한다. 고강도 조명으로 위스키에 때리기도 한다. 이런 시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영원한 건 없는 법이니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더욱이 기후변화를 고려하면 스카치위스키 전통도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최근 우리나라에도 위스키를 직접 제조하는 증류소가 두 곳이나 생겼다. 이미 70년대 위스키 제조를 시도했으나 '악마의 몫'으로 증발량이 너무 많아 포기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기술의 발달과 다양한 연구를 통해 오래 숙성하지 않아도 좋은 품질의 위스키를 생산할 수 있는 노하우를 터득해 자체 생산한 위스키가 하나둘 늘어나는 추세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위스키가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도 선전하길 기대해 본다.
우리나라 위스키 소비자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 대부분이 위스키의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로 '연산'을 꼽는다. '12년은 편한 친구들과 한 잔, 17년은 선물용, 21년은 아주 특별한 이벤트에 한 번' 뭐 이런 식이다. 가격도 대부분 연산에 따라 책정된다. 로컬 위스키 기준으로 12년을 100이라고 했을 때, 17년은 150, 21년은 320에 해당한다. 위스키의 연산이란 인간의 나이와 똑같은 의미지만 아주 조금 다르다. 위스키 제조 과정 중에서 오크통 속에서 얼마나 숙성했는가로 연산을 가늠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숙성이 중요하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숙성이 끝나 병입 된 위스키는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 가끔 집에 있는 17년 산 위스키를 3년 묵혔으니 20년 산 위스키가 된 것 아니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아니다. 10년을 더 보관해도 병에 들어간 위스키는 그대로 17년이다.
그런데 통상 우리가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카치위스키는 '블렌디드 위스키'이다. 대략 스무 가지 이상의 몰트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를 블렌딩(섞은)한 위스키다. 스무 가지 위스키 원액이 들어가 있다 보니 연산도 제각각이다. 예를 들어 '임페리얼 12년'이라고 하면 그 안에 12년 산 원액만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대개 12년 산일 테지만, 어떤 것은 13년이고 또 어떤 것은 15년 원액도 있다. 이때 블렌디드 위스키의 연산을 결정하는 것은 평균이 아니고 '최소 숙성 연도'이다. 따라서 12년 산 블렌디드 위스키라고 하면 스무 가지가 넘는 원액 중에 적어도 12년 미만 원액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그럼 여기서 문제, 50년 산 위스키 원액과 10년 산 위스키 원액을 블렌딩 하면 몇 년 산 위스키가 될까? (정답은 댓글로 달아주세요. 정답을 맞힌 열 분을 추첨해 특급 칭찬해 드립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 주세법에는 '연산'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다. 주세법 제5조 '주류의 종류'에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주정, 발효주류(탁주, 약주, 청주, 맥주, 과실주), 증류주류(소주, 위스키, 브랜디), 일반 증류주, 리큐르, 기타 주류로 구분할 뿐이다. 그렇다면 연산에 대한 규정은 누가 정할까? 스카치위스키 경우에는 'SWA(Scotch Whisky Association)'에서 한다. 스카치위스키가 성장해 오는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고치고 다듬어진 규정으로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진화해 온 원료와 공정과 숙성에서 나오는 색과 향과 맛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들이 양보하지 않는 대표적인 원칙은 다음과 같다.
당화, 발효, 증류, 숙성 과정 전체가 온전히 스코틀랜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물과 보리 맥아로 만들어져야 한다. 오직 통곡물(주로 밀)만 첨가할 수 있다.
발효를 위해 효모 이외의 다른 물질을 첨가할 수 없다.
오크통(최대 700리터)에서 최소 3년 이상 숙성되어야 한다.
물과 '플레인 캐러멜색소' 이외에는 아무것도 첨가할 수 없다.
알코올 도수는 40% 이상이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기에 스카치위스키는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과거 1,000년의 변화와 앞으로 100년의 변화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날 가능성이 높다. 기후변화의 시대에 언제까지 스카치위스키가 이러한 원칙을 고수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이 녹아든 위스키 한 잔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일지도….
긴 글을 인내하며 읽었다면 아마도 위스키 애호가일 터, 여러분에게 유용한 정보를 하나 제공하고자 한다. 아래 제품들은 필자가 기획했던 '임페리얼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15년 산 위스키지만, 12년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하지만 이 제품들은 커다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사실 이 제품들은 모두 17년 산 제품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블렌디드 위스키는 SWA 규정에 따라 최소 숙성 연도로 표기하게 되어 있다. 함유된 원액의 최소 숙성 연도가 17년이면 18년 산 위스키는 될 수 없지만, 15년 산, 12년 산 위스키는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이 제품들을 출시할 당시 "제품 탄생 15주년'이라는 메시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17년 위스키를 15년이라고 표기해 12년 가격으로 판매했다. SWA 규정에도 어긋나지 않을뿐더러 소비자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준다는 의미였다. 만약 어딘가에서 이 제품을 만나면 구입하는 편이 좋다. '한정판'이라는 희소성도 있지만 사실은 가격 대비 품질이 무척 좋다. 게다가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일종의 이스터 에그)도 담고 있으니 특별한 날 한 잔 하기에 이보다 가성비 좋은 제품은 없지 않겠는가.